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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연대기 - 김재룡 시집

지난 몇 달 동안 오래 붙들고 있던 시집을 이제야 내려 놓는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헌책방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헌책으로 팔리기에는 아직 싱싱한 새책이다. 이런 책을 만나면 깨끗이 읽고 헌책방으로 데려다 준 마음씨 고운 독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서점엘 갈 때마다 신간 코너에서 시집을 들춰보기에 분명 이 시집도 내 손길에 스쳤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 시집을 꾸준히 내고 있는 걷는사람, 반걸음, 달아실, 상상인 등에서 나온 시집은 빼놓지 않고 들춰본다.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제목과 약력과 목차 정도는 훑어 보는 편이다. 그렇게 스쳐 지났던 시집이 우연히 헌책방에서 다시 인연이 된 것이다. 다소 두꺼운 시집을 큰 기대 없이 들췄다가 숨이 턱 막혔다. 여백이 많지 않은 빽빽한 문장을..

네줄 冊 2021.06.26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척박하든 기름지든 태어난 자리에서 생을 다하는 너는 붉은 꽃을 피워 말한다 염치없이 챙기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붉은 열매를 달고 말한다 무턱대고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다른 이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너는 말한다 대롱의 욕망으로 꿀을 만들고 부리의 욕망으로 과육을 익히고 바람의 욕망으로 씨앗을 말리며 자가수분처럼 세습처럼 음탕한 것은 없다고 붉은 씨앗을 날리며 너는 말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의 가방 - 조기조 기술자의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문제가 해결만 된다면 기뻐할 뿐 당신을 애태우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을 낼 뿐 나사 하나 바꾸고 몇만 원 받는다고 사기..

한줄 詩 2021.06.26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침대에 누워 외눈 덮개로 얼굴 가리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 거즈로 덮은 눈과 산동산(散瞳)약 넣어 초점 잃은 눈 위에 안경을 얹고 희미하게 놓인 구두 찾아 꿰 신고 병원을 나선다.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걸음을 멈춘다. 9년 전인가 서천군 마량 선창가, 생선 부리는 배에 걸린 늘어진 깃발들이 안개 속에 갑오징어들처럼 매달려 있을 때 생선 잔뜩 실은 자전거 무게에 눌려 핸들 붙잡고 꼼짝없이 서 있던 사내, 눈은 뜨고 있었던가? 잠깐이 한참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처럼 경적이 울리고 핸들에 매달린 그가 자전거 바퀴에 끌려간 뒤에도 나는 거기 서 있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안개 밖으로 빠져나갔군. 걸음 떼는 순간 내가 그만 발 헛딛고 비틀거렸지. 동공 ..

한줄 詩 2021.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