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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술 한 병의 노동과 구름과자가 자유였다 그의 침상에 혈압계 살피는 발길들이 분홍 꽃병에 물을 채우고 갔다 마음관이 녹슬어 굳은 지 오래 고지혈 보일러 관 피떡이 공사 불가능인지 오래 아껴둔 동지팥죽 그릇이 얼어 터졌다 수도관 터져 폭탄 파열을 첫새벽에 홀로 감당해 보는 맛, 얼음은 천장에 부딪치는 반작용으로 내 정수리를 때렸다 우주로 연결된 모든 파이프의 통설이 각인되는 순간 다시 그 얼음 알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옛집 행랑채 처마 밑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쇠죽솥 활활 타던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듯 팥죽 얹은 제단에 촛불을 올렸다 고향 산의 구들장 들어낸 곳이 명당자리라 했다 관과 관은 피와 물의 언어라는 것 거짓으로라도 순환되어야 할 흰 털 짐승을 몰고 불빛 하나..

한줄 詩 2021.06.27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쇠비름 개망초 광대나물 바랭이,,,, 마당가에 잡초를 뽑는다 결국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런 나그네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통성명하지 말 것을 악수를 나누며 건네진 온기가 아직 말초에 남아 있는데 지갑 속에 차곡차곡 모아 놓은 명함들 꺼내보면 다시 만날 사람 몇이나 될까 공연하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린 욕심과 체면의 수인사 알고 보면 다 사연 있고 나쁜 사람 드물 듯이 도감 펼쳐 보면 약초 아닌 잡초 없는데 미워서가 아니다 쓸모없어서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어서 내 마음 온전히 다 줄 수 없어서 산란한 마음 번잡해서 뽑는다 보는 이 없어도 괜시리 아픈 마당가 풀을 뽑는다 *시집/ 이름을 달고 사는 것들의 슬픔/ 지혜 낭만에 대하여 - 박형욱 논둑길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

한줄 詩 2021.06.27

로봇 0호 - 윤석정

로봇 0호 - 윤석정 오십 살 영호 씨는 공허 속의 고물, 버린 짐짝 같은 흉물이 됐다 주물공장이 헛물켜던 때부터였다 영호 씨의 관절이 움직였던 모터가 멈췄다 모터에서 번쩍 수백만 볼트의 불꽃이 터졌다 사랑의 기억장치가 리셋됐다 영호 씨 모터를 누볐던 기름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름 한 방울 한 방울 가슴 언저리로 새어 나왔고 영호 씨는 급속도로 녹슬었다 최신의 모터를 장착했던 첨단의 과거 영호 씨는 사랑의 형식을 반복하여 생산했고 주물공장은 모든 형식에는 유행이 있다고 했다 유행이 지나면 다른 유행으로 대체되고 또 다른 영호 씨로 교체되는 시스템 속에서 영호 씨의 기억장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영호 씨는 반복의 형식을 반복할 뿐 반복되지 않는 사랑의 형식이 주입된 적이 없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에 ..

한줄 詩 2021.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