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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의 모자 - 이산하

미자의 모자 - 이산하 시를 쓸 때마다 이창동 감독의 명화 가 떠오른다. 잔잔한 강물 위로 엎어진 시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엎어져 있다. 멀리서 내 앞으로 운구하듯 천천히 다가오면 마침내 영화 제목이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시와 그리고 시체.... 언제든 예기치 않은 것들이 내 앞으로 떠내려온다. 진실은 수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시는 생사가 같은 날이라는 듯 강물이 운구하고 그렇게 얼굴이 사라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는 듯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심히 흘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물이 표정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단지 떠내려가는 것만 보여주는 게 시는 아닐지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시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미자의 모자처럼 물에..

한줄 詩 2021.06.29

늙은 남자 - 임성용

늙은 남자 - 임성용 종각에서 종로 3가까지 서울의 도심 일대를 태극기를 든 늙은 남자들이 점령한다 늙은 남자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를 하려다 돌아선다 그럴 때면 눈이 먼 비둘기가 더 슬프다 술에 취해 비척거리는 우산을 보았다 우산을 버린 늙은 남자가 국밥을 먹고 어슬렁거린다 늙은 남자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기세등등하다 젊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조심스레 피해 간다 주먹만 남은 눈동자가 흘러내린다 검은 버섯이 흘러내린 듯 골목이 질척인다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가 죽었다 넓고 다정한 그늘이 떠나고 막연한 계절이다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적암 - 임성용 강에서 태어난 안개는 여태 걷지 못하고 지난밤의 고요를 덮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 하나가 성긴 바람의 그물에서 빠져..

한줄 詩 2021.06.29

입산 - 강영환

입산 - 강영환 눈을 맑히기 위해 산에 들었다 비 온 뒤 숲은 깊어지고 고요하다 갖은 잎들이 흔들리면서 아는 체 눈에 든 나쁜 소리들을 지워가고 엽록소로 향기를 데려 와 코를 세워 준다. 각자 틈새 슬금슬금 들여다보는 하늘빛도 회색 벽에 갇혀 졸아든 살갗을 터주고 신경 끝까지 따라와 손등이 맑아졌다 산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가고 보이지 않던 새소리가 몸에 들어 와 뜻풀이 해보라며 난해하게 지저귀었다 어찌 알 수 있을까 그 해박한 깊이를 어쩌다 한 번 산에 들어 사는 눈에는 풀잎에 떠는 바람조차 어둠인 것을 온 몸이 산으로 가득찬 가벼움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내 눈을 깎아 귀를 넣고 작은 바늘 하나 얻어 가리다 도시 날카로운 모서리에 상처입은 사람들은 숲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가..

한줄 詩 2021.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