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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서 - 이형권

거문도에서 - 이형권 겨우내 바다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수평선 너머 저 혼자 장판지 같은 하루를 접었다 펼쳤다 바다는 속절없는 날들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바람 부는 모퉁이 벼랑길을 돌아서면 한겨울 매서운 해풍 속에서 앓던 열병을 동백꽃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잎새마다 선연하게 피꽃을 피워낸 것이지요 거역할 수 없는 운명만이 오직 붉은 가슴으로 피어나 겨울 바다의 쓸쓸함을 연모했을 뿐 지난 세월을 말해 무엇하리오 남풍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명주실 같은 봄빛이 반짝이고 어느덧 사랑과 이별의 경계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의 길들이 저녁노을처럼 아득해지고 보이지 않던 추억들이 뚜렷해지는 시간 홀로 그대의 열망을 사랑했던 날들만이 남았습니다 손 내밀어도 닿지 않을 변방의 극지에서 찬란한 애모 빛깔로..

한줄 詩 2021.07.29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할머니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쌈지를 훔쳤다 할머니는 가끔 그 쌈지를 열어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고쟁이 속에 손을 넣어 쌈지를 꺼내면 퇴계선생 하얀 심의(深衣) 차림으로 오솔길 걸어 나왔지만 주머니 속에는 세종대왕 우글거릴 것 같았던 매혹적인 주머니 두근거리는 가슴 닫아걸고 뒤안 정짓문 아래 쪼그려 앉아 열어 본 주머니에는 부적 한 장, 호박단추 둘, 내 중학교 교복에 붙었던 명찰 하나 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어디로 몽진(蒙塵) 가시고 없고 퇴계선생 낯익다는 듯 내 행실을 꾸짖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 사별이 슬펐던지 앙꼬 없는 찐빵을 가른 것 같은 서운함 때문인지 엉엉 서럽게 많이도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문상 온 사람들은 참 대견한 손주라고 그랬다 제사 때마다 엎드려 30년을 ..

한줄 詩 2021.07.29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헝겊인형 가슴을 훔친 솜뭉치에서 선반을 주저앉힌 녹슨 볼트에서 애타게 사람을 찾는 전단지에서 종이 결을 모르는 잉크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우스 표현할 줄 모르는 고장 난 턴테이블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알아볼 수 없는 필체에서 곰팡이 핀 식빵에서 벽장에 갇힌 꽃병에서 세월을 갉아먹는 서까래 부러진 목발 너는 우울을 생산하는 공장에 나를 취직시킨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구멍 - 박순호 -블루홀 깨울 수 없는 잠 빛이 도달하지 못하게 주먹 모양을 한 덩어리진 전설 벌어진 틈으로 속삭이는 공명음 들리는가 여기로 와서 나를 열어보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 많은 당신의 몫 나는 부지런히 눈치를 보며 퍼즐을 맞춘다 몸의 질문은 부자연스럽다 ..

한줄 詩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