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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꿈과 현실 나는 헷갈렸지만 모기는 피도 없이 들락거렸다 코를 골고 있는 너를 내려다보면 꿈 밖으로 터져나오는 현실의 비애 따위는 꿈에 긁는 한 쪽 뺨이었다 웃는 너는 종종 꿈속에서만 만났고 한 방울의 피는 현실에서 빠져나갔다 잠 속에서 뺨을 치며 너는 모기를 쫓고 있지만 현실에선 도무지 터지지 않았다 꿈 밖에는 쫓는 눈이 많아서 꿈속에서 손을 쓰는 건 속수무책이다 가끔 네 손을 대신해서 너의 뺨을 한 번씩 긁어주지만 눈을 뜨지 않는 너보다 나는 더 깜깜해져서 물어뜯긴 이빨을 찾지 못했다 나를 더듬어 찾던 네 손이 경계를 허문 내 옆구리에 잠시 닿았다 간다 네가 거두어 간 것은 빈손이었지만 나는 자꾸 앓듯이 피를 닦았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불면증(不眠症..

한줄 詩 2021.07.31

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바다는 여전히 환하고 달마중이나 기다리는 정박한 배들은 늙은 어부의 발소리를 귀신같이 알고 있지만 바람 속에서 저 혼자 무너지고 있는 지붕 언젠가 구급차에 실려 간 늙은 어부마저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남겨진 폐가 마당에 손질하다 만 그물이 뱀 허물처럼 아무렇게나 뒹굴고 페인트칠 벗겨 나간 담장에 하릴없는 담쟁이만 때 이른 장마를 몰고 와 청춘의 푸른 피처럼 흘러갈 것이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글루미 선데이 - 이기영 택배를 받아 커터칼로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은 곧 터질 듯 수상한 공기 방울들로 가득했다 위험을 감지한 복어처럼 상품을 둘둘 말아 빵빵해진 공기의 방들 핥아 줄 수도 다독일 수도 없는 짧은 혀를 가져서 혼자인..

한줄 詩 2021.07.30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팽나무의 궤도 - 김점용 아침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 팽나무는 거기 있었다 아버지와 싸우고 멀리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을 때도 팽나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집은 망하고 어떤 집은 흥했다 당집 할머니가 죽은 개 한 마리를 색동 줄로 칭칭 감아 둥치에 매면서 그날 밤 팽나무의 궤도를 정해 주었고 팽나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바위처럼 산처럼 서 있었다 달도 별도 팽나무 위에서 뜨고 졌다 태양은 오늘 출발했으나 팽나무는 어제 도챡해 있었다 집도 들판도 구름도 결혼도 장례도 모든 것이 팽나무를 중심으로 돌고 돌았다 돌고 돌아서 팽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차례차례로 들어갔다 꽃이 되고 열매가 되고 팽이가 되었다 바람에 마른 잎이 빙그르르 날린다 작은 회전이 큰 회전을 숨긴다 *시집..

한줄 詩 2021.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