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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폐허에 다녀온 뒤로 나는 범벅이다 아름다웠던 세상에 대해 회고할 준비를 끝마친 싸움들의 혼종 어떤 기억은 장난감 기차를 타고 간다 선로에 누워 잠들었던 이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폐허를 떠나온 뒤로 그 주소는 자꾸 선명해져만 간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장난감 기차를 타고 떠난다 손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범벅이 되어 하나씩 지워간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얼룩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다가 간직하게 된다 사랑으로 생긴 무늬는 언제나 형편없이 굴고 끝나지 않기 위해 반복되는 풀벌레의 노래 개울의 첨벙거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범벅 가를 수 없는 슬픔의 혼혈 서로를 끌어안다가 가녀린 얼굴을 어깨에 포개고는 헤어지지 말자..

한줄 詩 2021.07.21

흙수저 - 이산하

흙수저 - 이산하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어느날 한강에 투신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가 자기를 극적으로 건져낸 구조대원에게 억울한 듯 항의했다. "사고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 당신이 앞으로 내 인생 책임질 거야?" "....." "흙수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 왜 무책임하게 구하냔 말이야!" "....."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대신 아파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젊은 구조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묵묵히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만 이날 문득 처음으로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

한줄 詩 2021.07.21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태양도 깨어나서 보지 않으면 죽은 별이다. 나는 늘 깨어 저 바깥 끝에서 밀짚모자 같은 토성이나 삶은 달걀 같은 행성들의 소멸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나니 내 품계가 몇 단계 떨어져서 들어보지도 못한 왜소행성이 되어 그냥 떠돌이 별이 되었지만, 너희들의 바깥에서 더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 끝에서 기체의 사유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느냐! 저 바깥 끝에서 살아온 삶의 경계를 너희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깨어 있지 않으면 태양도 그냥 죽은 별이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출애굽기 - 주창윤 재앙의 나날들이었다. 열정의 청년 노예들은 애굽으로 팔려갔다. 한강 하구는 녹차라테가 되었고 양서류들은 시내의 우물마다 알을 낳았다. 열대 박쥐 떼가 들끓었고 독..

한줄 詩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