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머나먼 나라 - 이상원

머나먼 나라 - 이상원 -천년송(千年松) 비탈진 바닷가 관광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뒷산이 마을을 데리고 대륙과 한통속이 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바다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투리 새로 생긴 지번의 묵은 암석 위에는 세월의 천 년 굴욕을 견뎌온 소나무 한 그루 안쓰러워 치솟은 암반이 속내를 열어가며 한 폭을 받혀줄 뿐, 쉼 없는 해풍에 가지도 키도 잃고 하늘만 바라 엎드린 저 애껴운 혈혈단신. 웃자란 벚나무들 무더기로 상춘의 꽃 등을 다느라 지척에서 길은 밤에도 환하게 밝은데, 한 때일 뿐이야 자위하듯 중얼거려도 보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지나가는 배들의 한낮을 그리운 옛적인 양 굽어보며 더러 씁쓸하지만, 그래도 남몰래 여무는 솔씨들 눈빛을 반짝이며 잃어버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시집/ 변두리/ ..

한줄 詩 2021.08.02

언젠가는 부디 - 윤의섭

언젠가는 부디 - 윤의섭 이 말은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거는 주문에 쓰였는데 이루어진 게 없어요 효력이 약해서는 아니었어요 지켜보지도 않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죠 이 말은 간절하지만 무능력하고 때론 무책임하고 부디 내일 해가 뜨기를 이런 말은 어색하지만 세상의 모든 미래에 붙일 수 있는 염원 저주에 쓰이기도 하지요 후회할지라도 정말 견디기 힘들면 그러나 이 말에는 이미 언젠가는 같이 있지 않을 거라는 예언이 들어 있어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소원을 말해버린 거지요 행복하길 잘 살길 건강하길 꿈을 이루길 이 말은 축복을 주고 떠나갈 때 잘 어울리는 말이지요 쓰지 않을 말들의 사전을 작성 중입니다 사람 이름도 들어가고 연월일 잊고 싶은 날짜도 수록됩니다 부디 원뜻 : 바라건대 꼭 다른 뜻 : 곁에 없더라도 꼭 다..

한줄 詩 2021.07.31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나비는 생각도 없이 - 김가령 허공에서 허공으로 호랑거미 한 마리가 교차하며 집을 지어놓았어요 태양과 바람과 생각은 다 빠져나갔는데 나비 한 마리 덜컥 걸려들었어요 출렁, 아이가 던진 돌의 파문 길은 찢어지고 거미는 달아나고 끈적이는 날갯짓이 얕은 숨을 뱉어냈어요 해가지는 방향으로 모퉁이를 품고 걸어요 길은 막다른 표정을 내밀고 나는 모퉁이를 보고 모퉁이는 나를 봐요 작은 새 한 마리 그늘을 쪼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와요 검은 새가 눈물을 흘려요 하늘 위에서 보면 골목은 거미줄 같겠지요 난 그곳에 걸려든 한 마리 짐승 그날의 거미는 다시 더 높은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견고한 집을 지을 거예요 그날의 나비가 또 생각도 없이 날아오겠지요 생과 사가 맞물린 모퉁이 셀 수도 없는 직전과 직후가 나를 선택하고 있..

한줄 詩 2021.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