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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분석 - 이자규

야생의 분석 - 이자규 못난 버드나무만 베어져 둑 아래 던져졌다 십 년 후에나 읽힐 시를 쓰는 밤 돛대도 없이 삿대도 없이 버들잎들은 물 위로 떠났다 밟히면 밟힐수록 피가 도는 근성 목이 없어서 얼굴 밟히는 꽃 민들레 길 밟은 그날부터 내 목에서는 모래가 섞여 나왔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탱탱한 쓸개를 따오는 야생의 그림자들도 있다 고성능 도시에서 기르던 늙은 고양이가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식장 옆에 예식장이 새로 들어섰고 두 건물을 방문하는 꽃의 색깔은 서로 달라 생이별과 행복 세트가 나란히 살고 있다 기를 쓰고 길을 내는 사람들의 대도시란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의 식욕 아닐까 남새밭을 헤적여 모종을 핥아먹고 사라졌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물구나무 - 이자규 두 팔목으로 바닥을..

한줄 詩 2021.08.19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쪽창에 대하여 - 이윤학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쪽창에 대하여 - 이윤학 내가 밖에 나갔을 때 그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는 감쪽같이 사라져주었다 그는 느낄 수 없는 존재의 시발점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무모한 스토킹이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 내달리다 커브를 꺾지 못해 그대로 샛강을 나는 나를 잠시라도 지켜보았을 터 그는 밤샘 뜬눈으로 나를 지켜보았을 터 정신을 차리고 돌무더기에 널브러진 나를 주체하지 못할 때 일으켜 세워준 것도 그였다 그의 손이 입술을 꿰뚫은 돌부리를 제거해준 것이었다 자전거 핸들을 똑바로 세워준 것이었다 일그러진 바퀴를 굴려 집으로 데려다준 것이었다 부러진 이빨이 끊어내지 못한 희디흰 신경이 누레질 때까지 숨을 불어넣고 빼낸 것도 그였다 석유버너 불을 쬔 ..

한줄 詩 2021.08.19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느티나무 연가 - 이형권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무성한 날이 있었다 강물을 따라서 노래가 흐르던 여울목을 건너던 나루터나 뗏목꾼이 쉬어 가던 주막집 어귀 느티나무는 꼭 돌아와야 할 언약처럼 서 있다 하늘의 별자리가 흐르듯 세월이 흐르고 다시 돌아올 시간을 헤아리듯 밤하늘을 바라보면 추억이 시작되는 어느 길목에 아직도 무성한 그리움처럼 느티나무가 서 있다 첫사랑이 또아리를 틀었던 곳 등불 같은 이야기가 서리서리 모여들어 바람처럼 몰려와 우수수하고 몸을 떨면 겨울밤처럼 춥고 외로웠던 곳 강 건너 세상을 꿈꾸며 이른 새벽 노 젓는 소리 강물을 깨울 때 느티나무는 홀로 운 적이 있다 강물이 스치고 가듯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소년들은 벌써 지천명이 되었다 *시집/ 다시 청풍에 간다면/ 천년의시작 다시 청풍에 ..

한줄 詩 2021.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