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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장 - 김가령

손도장 - 김가령 오래전부터 발소리가 띄엄띄엄 흘러왔다 한때 그도 기계식 앞에서 잠시 흔들렸다 수전(手顫)의 순간이 올 때까지 손을 고집했다 그를 끝까지 지켜본 건 가게 앞 은행나무였다 나무의 굵은 생이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와 그의 옆자리가 되곤 했다 도장 속 이름들은 전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손끝에 만져지는 서체는 이름을 뚫고 들어가 뼈가 된 것만 같은데 명부만 남기고 그들은 떠나고 없다 아직도 그는 이름 바깥으로 나무 그림자를 새겨 넣는다 도장을 가만히 쓸어보면 누군가 풍경 속을 서성이다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면식도 없는데 웅성거리는 호명과 오래된 시간들이 손 안에 있다 막도장을 끝까지 손도장이라 부르는 이유, 이젠 알겠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조등 - 김가령..

한줄 詩 2021.08.26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말을 복제하다 - 권영옥 숲을 지나갈 때 운구차에 실린 어매는 말을 쏟아냈니더 입말은 가슴에서 일어나 밖으로 쏟아져도 밖의 소리는 외계가 아니었니더 감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오랜 세월 참았던 속을 한꺼번에 탁 터트리는데 어매 참 감나무 밑에는 말 껍데기가 수북했니더 그늘이 들마루를 덮을 즈음 어매는 청보리 들판을 눈에 넣고 있었니더 보리싹이 치근에 달라붙어 정신 어딘가에 쌓였던 이바구를 생마늘 엮듯 말을 엮어나갔니더 어매 이제 말 좀 그만하그라, 야야 니 인생 뭐 있는 줄 아나 내가 겉보리로 살아왔다 아이가, 구순 어매의 입에는 바람이 다 빠져버렸니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찾겠다며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지는 울 어매 그 속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를 건져 올리는데 말이 첫 울음을 시작하는 순간 ..

한줄 詩 2021.08.26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 차영섭 이거 하나 알았더니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줄이야! 내가 친구에게 어떤 제의를 했을 때 받아들일 경우와 안 받아들일 경우의 수는 반 반이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좋아할 경우와 기분 나빠할 경우의 수도 반 반이네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안 받아들이면 기분 상하고 고통을 겪는데, 이것은 나와 남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남이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나 태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경우의 수, 이 하나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네. 달을 보듯이 사람을 - 차영섭 사람을 항상 보름달처럼 바라본다면 말하지 않겠어요 달을 볼 때에는 초승달이라도 작지만 밝은 부분을 보고, 크고 어두운 부분은 아니 보지요 그런데 사람을 볼 때에는 크고 밝은 부분이 있는..

열줄 哀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