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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에서 - 김보일

그 여름의 끝에서 - 김보일 아마도 흐렸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너희들의 윤곽이 어슴푸레해져 너희들의 그림자는 서로를 허락하며 즐겁게 넘나들기도 했지만 후박나무 그늘로 내리는 여름이 하도 성급했으므로 태양은 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분주히 잎새들을 둥글게 키우고 바람은 또 무엇을 기억해 내려는지 미루나무 밑동을 바삐 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아라 여름은 늘 최초의 여름이었으므로 바람은 늘 새벽으로부터 다시 불어 왔으므로 태양과 바람의 기억은 낡고 낡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저녁에 새 이름을 부르러 너희들은 갔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별 - 김보일 목동이 별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자, 스테파네트는 그래, 어쩜, 하면서 맞장구를 쳐 준다. 목동은 신이 나서 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꺼내 놓을 태세..

한줄 詩 2021.08.31

비 오는 날 - 천양희

비 오는 날 - 천양희 하늘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먼저 젖는다 이런 날은 매운맛을 보는 게 상책이다 아귀찜 먹으러 '싱싱식당'엘 간다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입속이 화끈거린다 나에게도 분명 매운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비처럼 젖는 세상의 예사로운 일이여 어떤 것은 눅눅하여 얼룩 된 지 여러날이다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길바닥을 찍고 있다 자전거를 굴리며 소년이 천상병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시인은 죽어 거리를 남겼다 모든 확신은 증오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생(生)의 후반이 우두커니 서 있다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별나지 않은 일에 귀 기울이는 저녁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기를 써야 할 날은 오늘 같은 날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다시 쓰는 사계..

한줄 詩 2021.08.31

이명 - 김연진

이명 - 김연진 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갔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모든 소리는 방향이 없어졌다 소리의 혼돈 꽃피는 소리를 듣는다 피다의 소릿값은 봄 모든 무의미가 혼돈을 지나 의미가 되는 지점 나는 어느 봄, 목련이 피는 소리와 벚꽃이 지는 소리를 왜곡하며 듣는다 마치 내 목소리가 네 목소리인 것처럼 난청은 언제나 너에게 잠겨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소리 없이 지는 파문을 따라 흐르는 나의 기울기 값은 너 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갔다 모든 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정지되었다 *시집/ 슬픔은 네 발로 걷는다/ 한티재 난독 - 김연진 신의 영역에 다녀온 적 있었다 첫 경험처럼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희미한 뒷골목 꽃같이 피어 있는 깃발 몇 장의 지폐가 신을 부른다 신은 휘파람을 타고 내려와 낯선 조상이 되..

한줄 詩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