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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 이기록

오래도록 - 이기록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줏빛 유령 안에 들어가 밤새 온몸을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드라이플라워 - 이기록 아직 내가 젖지 않아서 너를 두고 있구나 가만히 두었는데도 너는 벌써 아무것도 남지 않은 구석에 들어와 있구나 휴일이 되어 술을 마셨고 검은 노래가 왔다가 사라졌는데도 너만은 유령처럼 옆에 서 있구나 그렇게 있구나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구나 이방인의 입술에 침을 바른다 ..

한줄 詩 2021.09.03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러시아의 목각 인형처럼 푸른 색조의 미소로 댐 같은 자비를 찾아 떠났다 보헤미안 언덕에 풍성하게 늘어뜨린 원피스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걷자고 해서 스스럼없이 걸었다 삶이 시작되는 허벅지 햇살이 내리쬐는 입술 양털 구름 아래 녹색 지대는 순항 중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마지못해 온 파티에서 우울한 한숨을 쉴 때 여인은 천국을 가자 했다 보헤미안 언덕에서 루마니아 여인은 머리를 풀고 야생화를 어지럽혔다 대지는 슬픔을 굴리며 갔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독거노인 - 김익진 오래된 한옥의 한낮이었다 방문을 몇 번 두드려도 정적뿐이다 그녀는 누워있었다 손은 번역할 수 없는 말처럼 떨리고 안부를 묻자 눈가엔 눈물이 고여있었..

한줄 詩 2021.09.02

노을 강 - 육근상

노을 강 - 육근상 눈물은 강물 같아서 슬픔이 울컥 나를 데리고 강으로 간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피 말리게 했는지 미쳐버리게 했는지 흩날리던 꽃잎도 강가에 와서는 또 한 번 뒤척이다 강물 소리로 돌아간다 덩어리째 떨어진 울음도 한쪽 다리 절며 서쪽으로 가고 텅 빈 방에서 노을 강 바라보는데 타다 남은 낮달이 흘러내린 이마가 벌렁거리는 심장이 다하지 못한 말처럼 훌쩍훌쩍 흘러간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새 떼 - 육근상 새 떼 날아오르자 먹감나무 이파리가 꼬리 흔들며 내려 앉았다 마당 켠 가마솥 아궁이로 몰려든 먹감나무 이파리에 눈알 하나하나 붙여주었다 개중 몇몇은 억새 바람에 홀려 호수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봄날 끝자락에 피어 당숙한테 머리끄덩이 잡힌 엄니는 말 한마디..

한줄 詩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