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안심이 되었다 내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자꾸 미움에 가닿았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귀 같은 것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지문이 하나씩 사라져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방황이 습관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불쑥, 이라는 말은 어찌나 황홀한지 고흐가 제 귀를 잘라 버렸을 때 그걸 종이에 둘둘 말아 여자에게 건넸을 때 그리고 붕대를 감싼 자화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때 더 이상 슬픔은 자라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며 돌아서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잠가야 하는 것들과 잠기지 않은 것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지나가는 행인 - 이기영 그때 이상한 오후를 지나가는 중이었어 깎아지..

한줄 詩 2021.09.06

햇빛 한 줌 - 이산하

햇빛 한 줌 - 이산하 그는 사형수로 3년 6개월을 살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사형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고 무기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좁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날 그는 무심코 자기 무릎 위의 햇빛을 보았다. 북서향의 독방에 두 시간쯤 가만히 머물다 떠났다. 날마다 눈꺼풀 같은 창문으로 스며든 시한부 햇빛 그 햇빛이 무릎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을 때가 마치 어린 딸이라도 보듯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이 햇빛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햇빛은 또 찾아와 가만히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수시로 찾아온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날마다 무릎 위에 ..

한줄 詩 2021.09.06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빛나는 책 - 박현수 -스마트 폰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 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 거룩한 이론에서부터 가벼운 하소연까지 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 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 사고전서의 서적을 다 넣어도 오히려 자리가 남는 얇은 책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당신..

한줄 詩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