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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 김백형

오십 - 김백형 반백이라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센 듯하다 오십이라고 하니 반토막 같다 다시, 반세기! 하고 되뇌어 보니 나도 역사의 한 페이지 같다가 쉰이라고 하니까 쉰내가 난다 지천명은 무슨, 하늘의 뜻을 알 리 있겠는가 나도 모르는데 나는 나를 가두어 온 나이테였다 간신히 뿌리 내렸고 갈 길 몰라 가지에 가지를 쳤고 궤변만 무성한 잎으로 피어내다 낯 붉히며 지고 말았다 몇 번의 대통령을 뽑았고 몇 번의 붕괴에도 용케 살았지만 비명에 먼저 간 형제들 있어 울음은 기억만 남기고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여직 오십을 돌보는 일흔여섯이 그늘도 없는 텃밭에 쪼그려 앉아 열무 솎아내고 있으니 눈꼬리가 습해 온다 나는 나를 결심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귤/ 걷는사람 똥살개 - 김백형 육성회비도 못 낸 놈이 뒤가 급..

한줄 詩 2022.08.12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당신이 돌아왔다 눈먼 낙과가 붉은 지팡이로 공중을 지치며 빈 나뭇가지를 찾아가듯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첨탑의 뿌리가 손금처럼 뻗친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갓 태어난 당신은 눈도 못 뜨고 좁고 긴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한 줌 석양을 마시고 있었다 창문과 창틀 사이에 낀 몇 가닥의 머리카락처럼 곱슬곱슬한 숨을 내쉬는 당신은 낯선 소도시의 거대한 요람인 광장에서 리아스식 발가락으로 붉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훌쩍 큰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돌아보았다 스무 살의 당신과 마흔 살의 내가 양끝을 붙잡고 돌리는 새하얀 줄 사이로 여든 살 당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가 줄을 돌리고 넘고 타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팔을 치켜들며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처럼 어둠이 ..

한줄 詩 2022.08.12

적정 온도 - 조온윤

적정 온도 -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 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 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 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 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 온도는 이십도 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 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 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주민센터를 나왔..

한줄 詩 2022.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