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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두번의 가을 이토록 많은 후손을 남겼는데, 가을까지 저지를 악행들을 생각하면 전쟁만큼 유용한 것은 없을 듯하다.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다다를 방법은 환상이다.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돌연변이적 망각뿐이다. 아들의 정의 폭염에 가로막혀 가을까지 오고 말았다. 고통은 강제로 삭제되었다. 전쟁은 아들의 것, 전쟁은 미래의 것. 반항은 분명 잠이 덜 깼거나 배가 고픈 상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 패전은 오직 생존이다. 노인들의 기억 수많은 모욕과 패배 속에서 건진 단 하나 승리의 기억. 기억의 증폭과 확신. 존재란 그 하찮은 기억의 결과물이다. 노인은 정의의 기회를 포착하고 자기 시대의 정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승리하였다. *시집/ 그림자..

한줄 詩 2022.08.18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잡아서 홰홰 팔 내두르며 삼심풀이 오후가 기울던 해거름 서울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날 보고 웃던 날 아부지, 아부지····· 오냐, 내 새끼····· 흠흠 서울 냄새 맡으며 주렁주렁 애호박처럼 매달리며 한 마리 서러운 꿀벌이 되어 어린 새끼는 잉잉 울고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아버지가 날 안고 홰홰 팔 내두르면 어느새 내 슬픔은 기쁨으로 활짝 울 아부지 왔다! 이것 봐라, 울 아버지 서울서 왔다! 동네방네 자랑에 호박꽃은 넝쿨지고 아버지는 새 구두에 뒷짐 진 채 아직 오지 않은 생선 장수 어머니를 마중 나가시고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아버지 냄새 - 황현중 나는 뒤끝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뒷간에 일 보러 갔다가 향기로..

한줄 詩 2022.08.18

사랑합니다 - 이정록

사랑합니다 - 이정록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아니라 제가 늘 들어야 할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젠가 사용설명서까지 올 거라 믿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 상처에만 필요한 약이라고 여겼습니다. 옹알이부터 시작한 최초의 말인 걸 잊어버리고 고쳐 쓴 유언장의 사라진 글자처럼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건넨 흉터들, 그 바늘 자국을 이어보고야 알았습니다.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기름에 튀긴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차가움을 지키겠습니다. 빙하기에 갇힌 당신의 심장을 감싸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을 들인 새끼손톱 초승달에 신혼방을 차리자는 가슴 뛰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당신 그대로 사랑합니다. 별자리와 구름의 이름도 바라보는 쪽에서 마음..

한줄 詩 202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