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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 정덕재

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

한줄 詩 2022.02.05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어느 나라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그리워한 적은 있다 그럴 때 나는 태엽 감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태엽을 감다 보면 자꾸 무더운 여름이 왔고 아버지는 노을처럼 녹슬어갔다 엄마의 방은 온통 한쪽으로만 감겨 있었고 늘 열려 있어 좋았다 저녁이면 내 입에선 혓바늘이 돋아 하수구 있는 좁은 마당에 빙글빙글 비행기가 한 방향으로 잘도 돌았다 그 어지러운 기류를 타고 나팔꽃이 피어났다 장난감은 고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싫증이 나는 거라 생각했다 눈이 따가울 때 어느 먼 나라는 가까이 감겨 있었고, 옆집 담 끝에 걸려 있던 파란 감이 서둘러 붉어지면 아버지가 돌아왔다 고봉밥이 올라오고 며칠 동안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장난감은 바뀌었지만 아버지, 나는 말하는 장난이 필요해요 주..

한줄 詩 2022.02.04

중심 - 김기리

중심 - 김기리 내게 있던 중심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자꾸 비틀거리던 것들만 내 몸에 깃들고 싶어 할까 그 수많던 얼음 신발은 유독 내 발에만 신겨 있는 걸까 바람 부는 날의 한 그루 나무라 여기자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중이었다고 여기자 아직 고요가 깃들지 않은 몸이라 이렇게 고마운 휘청거리는 중심 그냥, 그냥 휘청대는 중심에 서서 달력 한 장 또 넘어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부축했던 사람들이 흔들리는 나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시집/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어리고/ 문학들 저울 - 김기리 저울에는 바르르 떠는 중심이 있다는 거지 반듯이 이쪽과 저쪽이 있어야만 제 몫을 다 한다는 거지 이생에는 업으로 부르는 이름과 침묵해야 할 이름들이 중심에 모여들어 바르르 떨고 있을 거라는 거지 어제는 ..

한줄 詩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