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