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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 정덕재 시집

나는 유행 따라가는 데에 젬병이다. 최신 휴대폰이 나왔다고 바로 달려가지 않는다. 심지어 새폰으로 바꿀 때도 한두 해 지난 구형 모델을 선택한다. 옷이나 구두, 시계 같은 패션 유행과 속칭 핫플이나 맛집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딱 최신 상품에 관심을 두는 것은 출판물이다. 지독한 활자중독자라고 할까. 단 하루도 시집을 펼치지 않거나 글을 읽지 않으면 밥을 굶은 것처럼 허전하다. 만 원짜리 점심 메뉴와 만 원짜리 시집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 시집을 집는다. 물론 굶으면서까지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김밥같은 싼 메뉴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관심 가는 책을 외면하지 않는다. 읽고 싶은 책을 사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으나 책 읽을 시간이 가난한 것은 맞다. 그동안 시간을 낭..

네줄 冊 2022.02.10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 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

한줄 詩 2022.02.09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생체 시계는 누구의 의도된 프로젝트인가 크기나 두께의 정렬도 아니고 자동만도 수동만도 아닌데 내 몸의 시계를 조종하는 너, 누구냐 정밀하다 톱니바퀴들 맞물려 돌아가고 오차 없이 프로그램되어 시행되는 생체의 길 살의 톱니바퀴 뼈의 톱니바퀴 숨의 바퀴 피의 바퀴 내장은 내장대로 거죽은 거죽인 채로 내용물이 제 형태를 지키도록 살뜰히도 감싸 안은 가죽 자루의 책무 요즘 배설의 톱니바퀴 엇박자로 건너뛰어도 기동력 떨어져 좀 낡았거니 치부했을 뿐 이, 목, 구, 비 쓸 만하다 눙치고 버텼는데 일 났다 전두엽 쪽에서 보내오는 경고 메시지 깜박깜박 까물까물 긴가민가 우주의 톱니바퀴 무심히 돌고 있을 이 시간 나는 탕헤르의 바닷가에서 암고양이 그리자벨라의 '메모리'를 노래하고 있다 *시집/ ..

한줄 詩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