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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높이뛰기 - 신지영

몇 페이지 읽으면서 바로 느낌이 오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참 좋은 책을 골랐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읽는 내내 나의 말습관에 대한 반추와 함께 말 잘하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큰 기술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이 화법에 관한 처세술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언어의 사회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성격처럼 언어 습관도 타고난 것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본다. 글보다 말이 훨씬 그 사람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언어학자이자 음성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부문이 너무 많다. 가령, 언제부터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인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에 무릎을 쳤다. 노무현까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는 당선자였다. 이명박 때부터 당선자가 당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지영 교수는 언..

네줄 冊 2022.02.04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마을에는 오백 년도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몸통 여러 곳이 복사뼈처럼 울룩불룩하고 마을 뒷산도 가뿐하게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뒷산에는 또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개망초 다발이나 잔대 싹, 쑥개떡이 차려진 소꿉 밥상이 서서히 별 보자기에 덮이던 풍경은 온종일 서럽던 아이들이 차린 것이었다. 너럭바위에서 노는 게 심심했던 형과 누나들은 어른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몰래 느티나무의 복사뼈를 맨발로 디디고 올라가 제일 높은 곳을 손으로 짚고 내려왔다. 얼마 뒤 그런 형과 누나들은 군불을 지피는 어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도시로 떠났다. 뙤약볕 비탈밭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재구네 모친 넷째가 다녀갔는지 복사뼈 닮은 봉분 앞에 개망초꽃 한 다발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

한줄 詩 2022.02.03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남도창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는 아버지는 사시사철 감수성이 풍부한 사내다 날씨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복 더위에 어머니의 턱을 어그러뜨려 놓고 보양식을 사먹으러 읍내로 나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가리고 손을 내젓고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마을길을 피해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웅크린 채, 별이 뜨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부르러 오기를 기다리던 나날 겁 없이 잠들어 버리던 나날 무덤에 기대어 잠이 든 나는, 더 이상의 비극을 예상하지 않았다 *시집/ 즐거운 장례/ 곰곰나루 11월 - 박소원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손등에 점이 된다 어머니 귓바퀴에는 두 개의 점이 굽은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아버지가 다녀가는 계절 아버지는 운..

한줄 詩 2022.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