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마루안 2021. 5. 17. 22:30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어떤 약속이나 희망 없이도
민들레 질경이 엉겅퀴 뒤엉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다 지고
감나무 밤나무 고욤나무 주거니 받거니
저녁 밥상처럼 노을빛 가득 품었다

지루한 애인처럼 버리고 싶었던 오래된 집
마당 귀퉁이 반질반질하던 솥뚜껑 위로
적막이 모여든다

웃자란 아욱 순 뚝뚝 따 잘 익은 된장 풀어
두레밥상에 올려놓으면 
몸속까지 따뜻함으로 환했던 시간

파란 철 대문 빛깔 다 사위고
웃음소리 빠져나간 평상

푸른 밥상을 마주하리라는 희망으로
녹슨 대문에 풀색 칠을 입힌다

멀리 예배당 종탑 위로 넘어가던 햇살
미몽처럼 오래도록 걸려 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민들레의 생존법 - 조하은


아침이 되면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꽃잎을 닫았다

꽃잎 채 열기도 전에 발길에 밟히거나
갓털이 되기 전에 꽃받침이 스러져도
안간힘으로 다시 일어나 몸을 턴다

텅 빈 꽃대는 꽃이었던 기억을 물고 서 있다

바람이 꽃의 마음을 두드리면
바람의 등에 씨앗을 달고 어디로든 날아가야 한다
목적지 없이 나서는 길
가끔 아무도 원치 않은 길을 간다

외진 곳에 홀로 꼿꼿이 서 있거나
어딘가로 길게 돌아가고 있거나
백발이 된 머리로 바람에 흔들려 잊혀져가고 있거나
늘 경계를 섞고 있는 새의 영혼처럼
오래오래 한자리에 우뚝 서 있는
바오바브나무의 꿈을
생각한다

생의 절반이 바람이었던 그는
열 번째 항암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 조하은 시인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2015년 <시에티카>로 등단했다. <얼마간은 불량하게>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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