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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린 저녁 일요일 - 이병률

어느 비린 저녁 일요일 - 이병률 이십 년 넘게 다니는 지하 목욕탕에 괄호를 씻으러 갔다 괄호를 닦는 동안 하나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달랑 혼자 남은 목욕탕엔 어느새 한기가 들어와 사방을 둘러본다 시계를 보다 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나오는데 때밀이 아저씨가 손을 잡아끌며 소주 한잔 하고 가라한다 옷이라도 주워입고 앉겠다 했더니 다 안 입고 있노라고 옷 입으면 반칙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옷장 뒤 연기 속에서 고기를 굽는 벌거숭이 사내들 순식간에 물비린내와 비누 냄새와 괄호를 잡아먹는 저 현란한 고기 냄새들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다가 재차 민망한 기분이 되어 옷이라도 입자 했더니 냄새 밴다고 다 먹고 욕탕에 들어가 씻으면 그만이라는 이발사 담뱃불을 붙이며 방귀를 뀌는 이도 있었고 아랫도리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 ..

한줄 詩 2014.02.07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목수정

읽어야지 하면서 마음만 먹다가 놓친 책이 많다. 나중 인연이 되어 손에 잡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뒤로 밀려나 잊혀지고 만다. 목수정의 책이 그럴 뻔했다. 목록에는 올라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기회가 닿지 않았다. 뒤늦게 작정하고 읽었다. 이 책과 더불어 , 를 연달아 읽었다. 최근 이토록 한 작가의 글에 몰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던가 싶게 푹 빠졌다. 일단 그의 책은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똑 부러지게 야무진 글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묘한 끌림이 있다. 이전에 몇 번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에 실린 그녀의 칼럼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보니 그녀였다. 세 권 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감상 후기는 으로 정했다. 나는 이렇게 도발적인 제목이 좋다. 책 제목만 도발적인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 또한 도..

네줄 冊 2014.01.17

런던의 귀한 손님, 눈사람

영국은 한국보다 위도 상 훨씬 위쪽에 있으나 겨울이 한국보다 따뜻하다. 당연 런던에서 눈 구경 하기는 일년에 한두 번이다. 북부에 있는 스코들랜드는 눈이 자주 오겠으나 런던에 10년 넘게 살면서 눈 구경 한 것은 몇 번밖에 없다. 어떤 해는 아예 눈을 못 본 겨울도 있다. 설사 눈이 왔다 해도 금방 녹아버린다. 한겨울에도 웬만해선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없기 때문이다. 우기인 겨울엔 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 그렇다고 비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가랑비 정도다. 안개비도 자주 내린다. 매운 추위는 없지만 이런 날이 더 으슬으슬 한기가 스민다. 며칠 전 런던에 눈이 내렸다. 이렇게 많이 쌓이고 녹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눈 만난 강아지마냥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

다섯 景 2014.01.13

잘 가요 만델라

며칠 전에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다. 남아공 민주화의 상징이었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세계적 인물이다. 아프리카 출신의 현대 정치인으로 만델라만큼 거물이 있을까 싶다. 반정부 투쟁으로 장기간 감옥에 갇히고도 신념을 꺾지 않았다. 갖은 차별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았다. 런던의 예술 중심지 사우스뱅크센터 건물 옆에 만델라 동상이 있다. 평소에도 자주 지나가던 곳이다. 퇴근하면서 보니 만델라를 추모하는 문구와 걸어온 길을 건물 벽면에 빛으로 새기고 있다. 그가 평생 걸었던 자유를 향한 먼 여정이 끝났다. 세계인은 그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잘 가요, 만델라,,

다섯 景 2013.12.08

신통한 처방 - 조항록

신통한 처방 - 조항록 무지개약국 약사가 하루를 삼등분한다 살진 손가락 탓에 왠지 어설퍼 보이지만 그의 솜씨는 능란하다 습자지 두께로 복어회를 뜨는 옆가게 노련한 주방장의 칼질 못지않다 삼등분한 하루를 하루치 또는 이틀치 봉지에 담는 그의 표정은 모든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이르기를,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병과 친구가 돼야 해요 위장이 쓰리도록 약을 먹어보았자 치유되지 않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는 어떤 아픔들이 있어요 그는 선사(禪師)처럼 말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졌으나 궁리하듯 돌이켜보면, 그간 여러 병이 나를 문질러댔어도 병을 떠나보낸 건 약이라기보다 세월이었다 나는 식후에, 실은 그가 처방한 세월을 먹고 이불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푹 쉬어야 한다 *조항록 시집, 근황,..

한줄 詩 201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