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비린 저녁 일요일 - 이병률

마루안 2014. 2. 7. 21:21

 

 

어느 비린 저녁 일요일 - 이병률
 


이십 년 넘게 다니는 지하 목욕탕에 괄호를 씻으러 갔다
괄호를 닦는 동안 하나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달랑 혼자 남은 목욕탕엔 어느새 한기가 들어와 사방을 둘러본다
시계를 보다 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나오는데
때밀이 아저씨가 손을 잡아끌며 소주 한잔 하고 가라한다
옷이라도 주워입고 앉겠다 했더니
다 안 입고 있노라고 옷 입으면 반칙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옷장 뒤 연기 속에서 고기를 굽는 벌거숭이 사내들


순식간에 물비린내와 비누 냄새와
괄호를 잡아먹는 저 현란한 고기 냄새들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다가
재차 민망한 기분이 되어 옷이라도 입자 했더니
냄새 밴다고 다 먹고 욕탕에 들어가 씻으면 그만이라는 이발사
담뱃불을 붙이며 방귀를 뀌는 이도 있었고
아랫도리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 바닥에 끌리는 이도 있었다


밖에 여전히 비가 내리는지 모르도록 술판이 눈부셔갈 무렵
유민들이 제 살들을 찾아내 소금기름에 담그고 있다
어찌어찌 다섯 병의 소주병이 비워지고
탕 안에 붉게 구워진 몸통을 담그며
아프게 눈을 감는 사내들
수면에 내려앉는 저 고요한 취기를 태우고 떠다니는 물방울들
나는 술이 닿아도 젖지 않는 괄호를 걸어두고
사내들이 내려놓은 몸에 비누칠을 해주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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