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그늘 - 박연준 연애의 그늘 - 박연준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 한줄 詩 2016.08.02
버스 정류장 - 이미자 버스 정류장 - 이미자 손톱으로 누르면 무른 한낮이 복숭아처럼 으깨진다 나는 여전히 연애는 신파라고 생각하지만 떠나간 남자가 신문을 펼치면 전단지처럼 몰래 눈물을 끼워넣을 줄도 안다 버스는 늦게 온다 진부한 깨달음이 그러하듯 흙탕물이 얼룩진 사월의 평상에게 썩어가는 꽃들.. 한줄 詩 2016.08.01
누가 사는 것일까 - 김경미 누가 사는 것일까 - 김경미 1 약속시간 삼십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 한줄 詩 2016.08.01
바람의 딸 - 김사이 바람의 딸 - 김사이 어느 날 학교 파하고 돌아오니 안방에 아버지를 닮은 낯선 할머니가 앉아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할머니라 한다 등허리로부터 소름꽃이 토도독 피어오르고 놀라 엄마, 엄마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푸른 태양이 숨어버리고 그렇.. 한줄 詩 2016.08.01
회복기의 노래 - 박성준 회복기의 노래 - 박성준 이제는 괴롭지 않다 나는 여전히 더러운 것을 아름답다 치장할 용기가 없으나 다시 타오르는 대지의 울렁거림과 태양의 비스듬한 고해, 산중의 바위들이 불어대는 입김들을 예감할 수 있으니 조용한 그날의 봄과 나는 오래 싸우고 있는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죽.. 한줄 詩 2016.08.01
나의 아름다운 생 - 이성복 나의 아름다운 생 - 이성복 오늘 아침 내 앞에 놓인 생은 소 여물통 같다 이제는 쓸모없이 툇마루에 놓인 그것은 거의 고단한 기억이나 다름없다 미세 먼지가 그림자처럼 내려앉고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그곳에 일찍이 나의 양식과 노고와 눈물과 회한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목백일홍의 .. 한줄 詩 2016.08.01
슬픔은 씹어도 남는 것이 없다 - 조숙 슬픔은 씹어도 남는 것이 없다 - 조숙 길게 늘어선 자동차 사이를 돌아다니며 뻥을 파는 남자 하얀 마스크에 모자 눌러 쓰고 가슴과 어깨 양손 가득히 뻥튀기 풍선처럼 매달았다 막힌 곳이면 어디나 뻥 뚫고 나타난다 슬픔은 씹어도 남는 것이 없고 값도 싸다 가벼운 존재이다 뻥이다 뜨.. 한줄 詩 2016.08.01
오래된 시계 - 임성용 오래된 시계 - 임성용 서울 간 누님이 커다란 벽시계를 사온 것은 하마 삼십 년 전이었다 내 어릴 적 설날, 누님은 이쁜 옷을 입고 집에 내려와 가족 사진이 걸린 옷방 봉창벽에 시계를 걸어 놓았다 태엽을 감고 솔방울만 한 추를 흔들면 집 뒤안 대숲에 해가 뜨고 감나무 잎새에 별이 질 .. 한줄 詩 2016.08.01
인연에 관하여 - 박수서 인연에 관하여 - 박수서 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슨 자기력처럼 오른손이 끌려나갔다 왼손과 오른손의 결합, 맥을 집듯 조심스럽다 속살과 속살이 부둥켜 흔들려야 하지만, 등껍질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물갈퀴질을 하듯 손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딸국.. 한줄 詩 2016.08.01
두고 온 것이 있다 - 정진혁 두고 온 것이 있다 - 정진혁 시계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가에 서면 봉숭아 꽃씨 터지듯 흩어져 있다 내 황량한 마음에 꽃잎 비추는 날 다시 갈 수 없는 먼 곳에다 두고 온 것이 있다 누나는 생의 끝을 말아 쥐고 갔다 꽃잎의 문을 열고 가는 누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지워지지 않는 꽃.. 한줄 詩 201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