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아름다운 생 - 이성복

마루안 2016. 8. 1. 09:15



나의 아름다운 생 - 이성복



오늘 아침 내 앞에 놓인 생은 소 여물통 같다 이제는
쓸모없이 툇마루에 놓인 그것은 거의 고단한 기억이나
다름없다 미세 먼지가 그림자처럼 내려앉고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그곳에 일찍이 나의 양식과 노고와 눈물과
회한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목백일홍의 화사한 꿈을
꾸기도 했지만, 꿈은 이제 죽은 목백일홍의 꿈으로만
남아 있다 거기서 문득 성층권에서 귀환한 아내가
아프다거나, 오래 안 신던 신발이 집을 나간다거나....
그럴지라도 천 년도 더 묵은 노환의 아버지는 나와 내
아이들을 몰라보신다 아득하다는 것은, 까마득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냥 텅 빈 것이
아니라 놋주발에 담긴 물처럼 그 속까지 환히 비치는
생, 그 속에서 참매미가 애타도록 울고 나는 경기(驚氣)하는
아이처럼 부르르 떨며 일어난다 그럴 때 나의 생은 나를
키웠을지도 모를 새엄마처럼 낯설다 그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문득문득 내가 깨어나는 것은
허물어지는 생의 경혈마다 이따금 가느다란 침 같은
것이 꽂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수술해야 할 그 자리는
눈 까뒤집고 바라보면 돼지의 분홍 음부처럼 곱다, 고와라,
아, 거기 한번 손가락에 침 묻혀 간질여볼까? 고단한
섹스에 은박지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은 마냥 아름답다



*시집,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나의 아름다운 병원 -이성복



대학병원 유리창에 비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처럼
이 생은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다는 것일까,
푹푹 찌는 주차장 너머 불덩어리 해가 꺼지기 전에는....
빽빽한 느티나무 속에서 매미가 울고, 소리가 울고,
소리가 죽고, 그 다음엔 넌 또 어떻게 할 건데?
그래, 저기 지아비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여인은 퍽퍽
울면서 중환자실로 달려간다 너무 늦은 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주사라도 맞았으면,
뽕이라도 맞았으면, 내가 못 맞는다면 생이여, 너라도
맞았으면.... 생이여, 나는 또 구름카드를 공중전화
투입구에 넣고 통화를 시도한다 아무도, 아무 데서도
받지 않는 전화에 건성 말대꾸하며 나는 중얼거린다
중얼, 중얼거리면서 생이여, 굳게 닫힌 네 이빨 사이로
묽은 미음을 밀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여쁘디
어여쁜 나의 생이여, 어여 어여 뜨거운 물수건 꼭 짜서
끈끈한 네 이마를 닦아주면 넌 좋아할까? 어여, 어여
집으로 가라고 재촉하는 너는 그러나 내가 제 자식임을
기억하지 못한다 미친 척하고 어머니! 한 번 불러줄까?
불러주면 좋아하기나 할까? 붉은 땡볕 아래 뜨거운 팥죽
쑤어 새알이라도 먹여줄까? 솥 걸고 개 잡아 꺼덕거리는
'만년필'이라도 꽂아줄까, 네 입에, 아니면 핏발 선 네 눈에?
이래저래 생사가 복잡한 나는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의
어린 다람쥐처럼 이 생의 저변을 콩닥거리며 뛰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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