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집 - 최서림

마루안 2018. 2. 8. 19:53



오래된 집 - 최서림



내 몸은 이미 녹슬고 덜커덕거리고 있어


흘려보내야 할 것들, 더 이상 붙잡지 말아야할 것들을
살비늘 속에 다 떨쳐버리고 다 떨쳐버리고 싶어


모르스 부호처럼 내 귓속에 접속되지 않는 젊은 노래들,
둔탁한 나를 플라타너스 밑동 마냥 쓸쓸하게 하고
한때 즐겨 흥얼거리던 가사마저 문득
오래 전 가버린 여인의 S라인 몸매같이 낯설어지고


어깨 너머로 너무 많은 날들이 지나가버렸어


분침과 시침이 어긋나도 부지런히 돌아가는 시계처럼
헐떡이며 간신히 여기까지 흘러왔어


가끔씩 스텝이 엉켜도 그대로 넘어가는 탱고같이
단순한 인생이 그리워
더 이상 붙잡으면 추해질 것들을
탁한 세월 속에다 놓아버리고 싶어


밥물 끓어 넘치듯 부글거리는 욕망들,
빈 도마를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내 안의 식칼 소리들,
어느덧 앙금으로 가라앉아
남을 것들만 남아있기를


내 몸은 너무 메마르게 서걱거리고 있어



*시집, 물금, 세계사








흰 빨래같이 - 최서림



이 세상 오고 가는 모든 사람의 것이면서
아무도 움켜잡을 수 없는 저 하늘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라고
땅은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위로 위로 올라가기 쉽도록
하늘은 텅 비어 있다


아래로 파고들기 좋아하는 자들은
땅을 닮아 딱딱한 것을 좇아가고
위로 올라가길 기꺼워하는 자는
하늘을 닮아 투명하고
끝이 잡히지 않는 것을 찾아 떠돈다


이 세상에 흘러들어와
남쪽으로 난 창 하나만 끼고 사는 사람들
하늘이 유일한 부동산인 사람들
가을 하늘에 흰 빨래같이
자신을 널어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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