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사에게 - 강영환

마루안 2018. 3. 11. 20:12



독사에게 - 강영환



나날나날 졸라매던 허리띠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은 줄 알았다
풀어서 길에 패대기쳐버린 실직자의
다섯 입 매달린 질긴 목줄인줄 알았다
때로는 한 칸씩 구멍 줄여가며
허리를 죄기만 하던 젊은 날을 지나
낡고 문드러진 가장 자리를 포기할 수 없어
덧대 기운 무게에 눌려 그만
주저앉은 시퍼런 중년인 줄 알았다
가슴이 추락한 높이를 돌아보았다
내 가는 길 위에서 애써 널 만났으니
널 버린 독한 주인은 나다


굴곡진 성삼재 고갯길을 넘어 와
풀숲에서 날름거리던 그늘진 혀를
태양은 숨도 못 쉬게 등짝 위에서
깨어나라 채찍을 가했던 숱한 정오가
아스팔트 진득한 피로 녹아내리고
살모사여, 독 한번 내뱉지 못하고
길을 건너다 다 가지 못하고
길허리를 묶은 띠가 된 독이여
모든 숲 모진 그늘을 다 용서하고
길을 풀어 네 강을 흐르게 한다



*시집, 출렁이는 상처, 책펴냄열린시








오래된 무덤 - 강영환



달빛이 닿지 못하는 숲이 있다 그 숲
정령은 강을 찾아 떠나고 그늘에는
젖은 잡풀과 가시나무를 둘러 쓴
무덤 하나가 오래 숲을 지켰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찾지 못할 봉분은
낮아지고 한쪽 어깨가 허물어져
배고픈 삵이 파헤친 흔적일까
맨살 드러낸 채 땅바닥에 납작하다 그래
누가 잠들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도 껍질을 버리고 돌아간 뒤여서 이미
바람도 찾지 않는 폐가가 되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만난다
무너진 봉분 앞에서 돌보지 않는
지나 온 햇살을 돌아보는 건 무의미하다
내게 남은 특별한 윤슬은 신기루였고
불현듯 잡풀 우거진 보편성만 남아
색칠되지 않는 숲을 적실뿐
시간도 모래 언덕처럼 무너져 그늘이 되고
산이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을 떠나는 뒷모습만 낮게 보여주는 몸짓
아주 천천히, 죽음도 천천히 떠나는구나





# <오래된 무덤>을 이 시집의 대표작으로 생각한다. 내 맘대로다. 이 시를 읽으면서 詩歷이든 視力이든 삶의 연륜이 그냥 쌓이는 게 아님을 느끼게 한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나의 서툰 삶에서 이런 시가 깨우침을 준다. 좋은 시 읽은 미안함에 시인의 자서 일부를 옮긴다.


자서

.........

눈 감았다 뜨니 등단 40년이다. 내세우기엔 아직도 모습이 초라하지만 다시 굽이 하나를 돌아가기 위해서 짐 하나를 내려 놓는다.

더 깊은 상처 속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로 띄우는 부고 이은심  (0) 2018.03.11
동행 - 김윤배  (0) 2018.03.11
집에서 멀리 가다 - 이서인  (0) 2018.03.11
빨간 잠 - 천수호  (0) 2018.03.11
두 외가 - 정원도  (0) 2018.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