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행 - 김윤배

마루안 2018. 3. 11. 20:16

 

 

동행 - 김윤배


너는 젊은 날의 미친 듯한 삶을 말하며
내 잔을 거부했다 나의 설렘은
서녘 바다로 지는 붉은 해 때문이었다
가슴으로 차 오르던 서해 바다를 두고
나는 소멸을, 너는 생성을 생각했다
그 간극이 생명의 순환을 넘어 불화로 온다
그래서였을까 술잔에 잠기는 바다를 두고
나는 격렬한 기침을 했다
가슴속 개펄처럼 펼쳐진지 오래고
더러운 침묵들이 기도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바다가 올라와 있던 창에 어둠이 차는 동안
술잔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붉은 꽃들은 바다를 밀어내고
이미 저버린 꽃숭어리들이
썰물 진 해안을 붉게 물들인다
밀고 써는 바다, 또는 생성과 소멸을 두고
해안의 침묵은 더 오래고 견고했다


*시집, 부론에서 길을 잃다, 문학과지성

 

 




남행 - 김윤배


해송 사이로 꿈이 먼저 달려간
미혹과의 동행을 죄라 말하고 싶었다
가 닿을 수 없는 생의 절정 혹 욕망으로 채우며
미혹만이 나를 밀고 가는 힘이었노라
말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나를 죽이려 덤비는 욕망 속에서
끝까지 가보라 가보라 외치던 아픈 기억,
끝까지 간다 한들 겨울 솔잎 같은
살의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송림 사이로 해가 진다
붉은 햇살이 숲의 깊고 푸른 가슴을 깊숙이 찌른다
햇살이 닿아 있는 저 비밀한 공간은
내게 욕망이며 무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싸우고
나를 살해하고 나를 매장했다
깊고 푸른 가슴이 미혹의 입구이며 출구였다
피가 흐르지 않는 죽음은
매혹적인 꿈과 이어져 있었다

해송 사이로 어둠이 온다
느리고 달콤한 발자국 소리가 몸 안으로 든다
성전처럼 조용해진 몸은
어둠의 발자국 소리 크게 울린다
격렬하던 것들의 밤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향해 귀를 연다
죄의 목소리가 조용한 몸 우렁우렁 울린다
어둠 깃든 몸은 다시 침묵의 미혹에 빠진다
남행은 죄를 예비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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