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 손현숙
위험이 내는 길은 싱싱하다
북한산 염초, 만경 하루에 치고
하산하는 길, 산이 출렁 땅이 빙빙 돌고 돌아
팔다리 제멋대로 흔들리며
내가 산이고 땅이고 바람이다
빗방울 한두 방울 묻어나는 골짝
비구름과 한바탕 뒹굴어도 보고
바람의 나라에선 머리칼 뿌리째 흔들렸다
절벽길 붙들어서 벼랑 꽃하고 눈맞았을 때
아찔, 천 길 낭떠러지가 지척이다
지금 실컷 살다 가는 거
일하고 울고 웃고 떠들어 난장 치면서
흑암을 꿰차며 사라지는 유성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몽땅 탕진하는 거
피를 화끈 돌려 보는 거
살아 있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바닥 치면서 저기, 궁창에 흐르는 말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 여기서 당신하고 눈 맞추면서
미끄러지면서 슬픈, 기쁜, 오늘
한판 잘 붙어먹었다
*손현숙 시집, 손, 문학세계사
먹이 - 손현숙
깨끗하게 씻은 얼굴에도 미생물 살고 있다
맹수처럼 날카롭게 발톱 세워 움직인다
곪거나 상처 깊은 자리가 놈들의 거처다
누구나 뒤집어썼던 살가죽
온전히 벗어버리는 그 순간 하늘에는 별이 한 채 뜬다는데
널뛸 때 누가 쿵, 하고 있는 힘껏 구르면
또 누가 훌쩍, 하늘로 솟구치듯
누더기로 뒹굴었던 삶일수록 저 막막한 시간 속에서는 더 반짝, 눈부시게 되살아나는 걸까
환부가 깊을수록 살 속으로 파고들어 실컷 배부른 저 미물들처럼
내 허기는 그의 성스러운 만찬이다
혼자 먹고, 입고, 자면서 그는 조용히 나를 등졌다
오늘은 내가 그를 부수고 내일은 또 그가 나를 허물어
부지런히 서로 먹고 먹히면서 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궤도를 돌아
우리, 갈 데까지 가볼까?
죽지도 못하고 명왕성까지 걸어가는 중이겠다
# 싯구 한 구절 한 구절이 착착 가슴에 감기면서 읽힌다. 적절한 비유에 맞는 어휘를 잘 주무를 줄 아는 시인의 오랜 내공이 느껴진다. 사랑이 시시할수록 삶은 거룩하달까. 대부분의 인생을 허비하며 누더기로 뒹굴었던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읽을수록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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