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휘영청이라는 말 - 이상국

마루안 2019. 2. 21. 22:27



휘영청이라는 말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 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잠깐 사이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살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 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환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반갑고 당당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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