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눈물 이후 - 권상진 시집

마루안 2019. 2. 21. 23:12

 

 

 

요 며칠 동안 이 시집과 함께 했다. 일 나가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 달래듯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전철에서 한두 편씩 읽는 맛이 쏠쏠했다. 흔히들 요즘 유행하는 달착지근한 시는 아니다. SNS에 들불처럼 유행하는 뽀시시한 짧은 문장은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은 있을지 몰라도 공허한 갈증은 심해진다.

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상에 시집은 넘쳐나도 읽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일까. 시집은 시인들끼리 자체적으로 소비를 한다. 일종의 시집계 내수 경제인데 시집을 내면 서로 기증하는 관행이다. 마치 경조사 부조목록처럼 저번에 받았으니 이번엔 보내야 하는 약속 같은 것이 시인들끼리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인맥이라고 기증 시집을 많이 받는 시인이 마치 실력 있고 잘 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걸까. 평론가들이야 시집 읽고 비평을 해야 하기에 기증 시집을 받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평론가도 제 돈 내고 사서 읽음 좋겠으나 그것까지 바라진 않더라도 시인들이 시집을 많이 사야 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시인이 있는가. 그들이 조금만 성의를 보인다면 유료 판매 초판 매진은 거뜬할 것이다. 이따금 헌책방에서 아무개 시인에게 보낸다는 글이 적힌 시집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시집을 발견하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산고 끝에 만들어 애써 기증한 시집인데 이것을 보낸 시인은 알까라는 씁쓸함과 나같은 가난한 독자에게 팔천 원짜리 시집을 삼천 원에 살 수 있게 인연을 만들어준 고마움이다. 서점에 새책으로 꽂혀 있었다면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눈물 이후>는 제목처럼 슬픈 시가 많다. 내가 워낙 슬픈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시 내용이 참 좋다. 덤으로 실린 시가 없을 정도로 작품성도 고르다. 은은하게 적셔오는 슬픔 감정이 읽는 동안 충분히 감당하면서 감동을 조절할 시간을 준다. 싸구려 억지 슬픔이 아니라 격조 있는 슬픔이랄까.

첫 시집이라는데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가 되는 시인이다. 이 시집은 시산맥 제18차 감성시선 공모에 당선되어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17 권이 나왔다는 건데 왜 그동안 이 시집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제목만 발견하고 내용에 실망한 시집이 너무 많기에 좋은 시를 읽게 해준 시인이 고맙다.

아쉬움이라면 표지 디자인이다. 용케 내게 발견되긴 했으나 은박에 묻힌 흐릿한 제목이 숨어 있기 딱 좋은 책이다. 구슬이 서말이래도 꿰야 보배,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 시는 죽은 시다. 내가 또박또박 필사해 좋은 시를 노트에 옮기고 까다롭게 골라 블로그에 올리는 이유다.

유명한 시인, 많이 팔리는 시집 그런 거 상관 않는다.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 좋은 시를 구분해 읽고 싶다. 흔히들 가성비 갑이라는 말을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9천 원 투자로 뻑뻑힌 감성을 정화시킬 수 있는 가성비 갑이다. 감히 말하건데 눈물 이후는 참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