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푸르렀던 시절에는 - 이중도
한창 푸르렀던 시절에는
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이 되고 싶었다
진창 밟아도 발자국 남기지 않는 선사(禪師)의 목소리가
늘 귀에 발자국을 남겼고
아프리카에서 독신으로 흘리는 땀들이
밤하늘 별 무리로 맺혀 있다가 이른 새벽
더운 눈물로 풀어지곤 했다
한창 푸르렀던 시절에는
사람의 집들을 성냥갑으로 만드는 산정이
외로운 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저물녘에는 밑도 끝도 그림자도 없는 바람이
술상을 차렸다
집은 번뇌를 키우는 태(胎)이기에
살에 몸이 닿지 않는 불이고 싶었다
동정(童貞)의 불이 추는 깨끗한 춤이고 싶었다
한창 푸르렀던 그 시절에는
목마른 강물이 마음 바닥을 기억가는 줄도 몰랐다
인생을 나룻배로 가두고 이러저리 데리고 가는 강물이
세상 모르고 흘러온 강물 하나 만나
눈멀고 귀먹어 집 한 채 지을 줄은
정말 몰랐다
*시집, 시벽시장, 시와시학사
흙길 하나로 - 이중도
낙락장송은 가진 적 없어도
내게 길은 몇 있었다
마당에서 걸어 나가 저녁 바다로 사라지던 길도 있었고
잔잔한 바다 위로 달빛이 내던 살가운 길도 있었다
메뚜기 잡아 닭 모이 주던 풀밭 길도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
초등학교 속으로 흘러들던 코스모스 길도 있었다
새끼 노루 첨벙거리며 뛰어가던 논둑길도 있었고 비갠 아침
섬 위로 떠오르는 햇살을 밟고 오던 길도 있었다
태풍이 불면 하늘로 물기둥 솟아올랐다
참붕어 푸르게 헤엄치던 실개천은 마르는 법이 없었다
흘러가는 세월 따라 그중 몇은 사라졌고 남은 길은 아프다
아스팔트에 질식사한 것도 있고
자본이 솟아오르는 터가 된 곳도 있다
풋사랑 따라 흔들리던 코스모스는 흔적 없고 여름밤
풀밭에서 나와 서성거리던 뱀들도 사라졌다
토끼가 사라진 달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고 있다
눈 부릅뜨고 굴러다니는 욕망 앞에 온전한 것 없는 세상이라
시대에 윤간당하는 무명 저고리 같은 그 길들의 운명
어쩌면 당연지사겠지만
길 사라졌다고 길 따라 걸은 내 발자국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아
마음은 늘 그 발자국 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하여, 낙락장송은 아니어도
작은 새 둥지 치고 풀벌레 울음 깃들여 살 수 있는
흙길 하나로
니,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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