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 김화연
이맘때라는 말은
일 년 언제든지 있는 때
지나간 시간을 느닷없이 소환하는 때
작년과 재작년을 오늘로 불러놓고
어금니쯤에 고이는 신맛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때
이맘때라는 말은
흰 구름 의자에 앉아
파랗게 익어가는 나뭇잎에 들뜨고
이빨 사이로 굴러다니는
빈 씨앗 같은 말들이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때
우리는 이맘때를 앞에 놓고
날리는 머리카락 쪽으로 웃고
떨어지는 열매 쪽으로 시무룩해진다.
비술나무 그늘 밑에서 손뼉을 치며
술래의 속눈썹으로 떨렸던 이맘때
이맘때라는 말이
저 맘과 그 맘 사이에서 편지를 쓴다.
느린 우체통 안에
마른 겨드랑이에서
몇 글자 꺼낸 즐거운 기억을
우리 맘대로 소환하여 되씹는 이맘때라는 말이
흐르는 구름 속에 가려지고 있다
*시집, 내일도 나하고 놀래, 천년의시작 *2018년 11월 발행
천적 - 김화연
죄지어 고개 숙이는 멱살이 있어
손아귀 하나 피해 다녔다.
어쩌다 그 손아귀에 잡히는 날이면
바짝 마른 능소화같이
쏟아진 물컵같이 체념이다.
늦가을 바람에 뒹구는 파지(破紙)다.
살다 보면 누군가는 내 멱살 잡고
굴욕의 길 함께 가자고 할 것이다.
꽃잎에겐 허연 입김이 천적이듯
빨래에겐 소나기가 천적이듯
죄지은 멱살에겐 느닷없는 손아귀가 천적이다.
나는 천적이 있어 날개가 돋아났고
두 손이 공손해지고
미안하다는 말을 껌처럼 씹었다.
목을 잠그기로 했다.
어떤 굴욕도 들지 못하게
뻣뻣이 세웠던 목 불러들여 숨죽이라 했다.
세상의 어떤 용서, 어떤 굴욕보다
더 낮게 목을 내리기로 했다.
태어나면서 동행한
목숨이라는 천적을 모른 척하는
나이가 되기로 했다.
# 김화연 시인은 전북 순창 출생으로 2015년 <시현실>로 등단했다. <내일도 나하고 놀래>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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