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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 김언

어디서 그런 집중력이 생겼는지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시인한테는 미안한데 김언은 시보다 비평글이 더 좋다. 그의 비평글은 묘하게 읽는 이를 집중하게 만든다. 문장에 공감하며 거기에 빨려들게 만드는 재주는 전적으로 글쓴이에게 달렸다. 아주 시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시론집이라고 하지만 어렵지 않게 읽힌다. 많은 평론가들이 온갖 문학 이론과 고상한 문장을 동원해 독자를 주눅 들게 만드는데 이 책은 쉽게 이해가 된다. 시에 관한 시인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니 어느덧 마지막 장이다. 근래에 이렇게 집중해서 읽은 책이 있었던가. 모처럼 책다운 책 읽은 기분이다. 혀를 뽑아 삼킬 듯이 숨막히는 키스와 함께 허벅지가 뻐근하도록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나면 며칠 섹스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있..

네줄 冊 2019.06.12

나의 작은 시인에게 - 사라 콜란겔로

예술을 사랑하고 시를 쓰고 싶은 리사는 중년 여성이다. 직업은 유치원 선생이다.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과는 달리 엄마에게 늘 반항하는 자녀들과 자주 티격태격한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스마트폰만 쳐다 보고 있다. 정성껏 마련한 음식도 남편과 둘만 식탁에 앉아 먹고 아이들은 따로 피자를 시켜 정원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면서 먹는다.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밖을 싸돌아 다닌다. 리사는 자식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메말라 가는 세상이 걱정이다. 일찍부터 문학 지망생이었고 지금도 평생교육반에서 시 강의를 듣는다. 자신이 재능 없음을 알지만 그녀는 예술지상주의자다. 어느 날 돌보는 유치원생 아이가 시를 중얼거린다. 너..

세줄 映 2019.06.12

꽃이 사랑한 사람 -김남권

꽃이 사랑한 사람 -김남권 너는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의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가 들꽃을 흔들어주는 바람이었다가 바람 속 들꽃 향기를 품은 물안개로 팔월의 풀이파리 속속들이 푸른 별빛을 풀어놓을 것이다 너는 비로봉 자락 겹겹이 흘러내린 능선마다 소나무가 흔들어주는 풍경소리였다가 풍경 속에 들어앉은 금강초롱이었다가 금강초롱이 머금은 새벽이슬이었다가 이슬이 밤새 풀어놓은 초연한 별빛으로 깨어나 이름 없이 피어나는 꽃, 그 꽃이 보기에 가장 흐뭇한 사람이 진정 너일 것이다 *시집,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오감도 인연의 길 - 김남권 망설이지 말고 은밀하게 몸이 적멸(寂滅) 하는 마음이 일러주는 길을 가라 고운 한지에 켜켜이 꽃잎을 싸는 향기로운 인연 마치 농현(弄絃)하듯이 때론 아프지만 불꽃이 되고 때론 기..

한줄 詩 2019.06.12

담장이 되지 못한 벽돌에게 - 박정원

담장이 되지 못한 벽돌에게 - 박정원 거대한 조직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고 쓸쓸해하지 마라 높고 견고한 담장이었더라면 아랫머리를 짓밟고 고린내 나는 위 그늘에겐 평생을 조아리며 옴짝달싹도 못했을 것 아니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육중한 경계를 긋지 않게 된 너를 외려 부러워할지니, 자유로워라 어둠에 팽개쳐진 벽돌 한 장이여 상처투성이로 살지 않았다면 어찌 무상으로 세든 독거미의 갖은 횡포를 목격할 수 있었겠느냐 휘돌아오는 바람을 되돌릴 수 있었겠느냐 다시는 담장이 되려 하지 말고 풀벌레 편히 드나들 고요한 집이 되라 *시집, 뼈 없는 뼈, 종려나무 명예퇴직 - 박정원 네 편 내 편으로 가르는 동안 벽 속에 뿌리를 튼 자물쇠도 서서히 녹이 슬어갔다 쇠사슬에 묶인 주먹들을 불러내보니 부스러기 일어나는 쇳가루에 불..

한줄 詩 2019.06.11

나의 불량 위생사

어릴 때 화장실이 없었다. 측간이나 변소라고 불렀다. 볼 일을 보고 손을 씻은 기억이 없다. 외출 후에 옷을 갈아 입은 적도 잠 잘 때도 외출복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이면 방바닥에 흙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 위에다 가방을 내던지고 강아지와 놀았다. 친구들과 다마치기라는 것을 했다. 다마치기 후에 그 유리 구슬을 입에 넣기도 했고 동전을 입에 넣기도 했다. 껌은 며칠씩 씹었다. 밥을 먹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는 벽에 붙여 놨다 다음날 떼내서 다시 씹었다. 때론 깜박 잊고 그냥 잤다가 머리에 껌이 달라 붙어 애를 먹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껌이 붙은 머리카락을 어머니가 가위로 잘랐다. 나의 위생사는 이렇다. 이미자 목, 이미자가 죽으면 일본에서 그녀의 목을 가져간다고 했다. 곡마단 ..

열줄 哀 2019.06.11

할미꽃을 보고 나는 알았지 - 김시동

할미꽃을 보고 나는 알았지 - 김시동 작은 바람도 귀찮고 햇살도 지나가는 객이다 가시밭길 돌담에 기대어 무거운 삶에 다 주지 못해 깊은 시름에 한숨이다 뭐라고 실컷 말하고 싶고 마음껏 부르고 싶은 심정 하늘도 알고 땅도 알지만 갈 길이 바빠 그냥 떠나온 이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애간장만 타다 진 붉은 꽃잎 더욱 더 진하니 핏대 올리며 말한 것을 왜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까 흰머리 보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내가 불효자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집, 춘삼월 처갓집 매방 저녁, 북인 저울 - 김시동 흐르는 물도 지나는 바람도 꽃도 산들도 지나온 과거는 돌이키지 않는다네 저울질을 하다가 지쳐 쓰러지면 원망과 욕망의 옷이 좋게 보여 그 옷 입고 나들이 잘하는 자네에게 다가오는 손님은 모두가 상처만 주고 떠날 뿐일세 모..

한줄 詩 201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