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 고진하

마루안 2019. 6. 10. 22:49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 고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 잡혀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윈 순결한 사랑이

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 그대의 길을 떠나라



*시집, 명랑의 둘레, 문학동네








티끌의 증언 - 고진하



불의 터널을 지난 뒤 화로(火爐)에 남은

뼈 몇 조각.

오, 그이가 살던 궁전은 어디로?

늘그막엔 초라하게 변했지만

오, 그이가 가꾸던 욕망의 오두막은 어디로?


저 뼈 몇 조각을,

절구에 곱게 빻은 한 줌 재를

읽으라,

점자를 더듬듯 읽어보라는 것인가

눈멀고

귀먹은 세월의 고통조차

존재의 빈 칸으로 확실하게 처리될

저 티끌의 증언을,

부재의 영원한 공식을 되새기라는 것인가


유골함 앞세워

육중한 철문 밀고 나가자

가장 가벼운 것을 거둔 맹목의 하늘이

가장 가벼운 것들을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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