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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 서규정

유적 - 서규정 반송동 화훼단지 앞 꽉 막힌 버스 속이다. 기사님께서 뒤에 껌 씹는 아지매 껌 씹지 마소 아침부터 신경 쓰이고로 그라믄 신경만 끄고 가소 씹지 마소 앞만 보고 가소 아줌마 절대 지지 않는다 보소 녹수청산에 붙는 불도 님 찾는 여우꼬리에서 붙고 먼 바다 해일도 놓친 물고기 비늘 하나 때문에 뭍으로 오는 기라 우째 남자가 껌 씹는 소릴 몬 참고 이 퉁박이가 그 입 닫으소 아가리라 부르기 전에 엉! 보소 이 냥반아 여기 새끼손톱만한 꽃들도 세상을 딱딱 씹으려 피어나는 거 안 보이나 당신은 또 이 버스의 대통령 아닌가 베 손님은 왕인데 오데 대통령 따위가 앙야! 한 마디 더 쏘고 유적 발굴 중인 동래 시장에 아줌마는 내렸다 누구 여편넨지 골 때려 부리네 쯧! 질곡을 건너는 목소리엔 진흙들이 묻어..

한줄 詩 2019.06.18

빗속을 간다 - 류정환

빗속을 간다 - 류정환 발목을 적시지 않고 이 세상 어떻게 건널까. 밤낮으로 비가 내려 발끝마다 물길을 징검다리 건너듯 겅중거리는 빗줄기 사이, 사람들 사이 아무리 조심을 해도 입방아에 올라 이마를 찧듯 어느 틈에 신발에 물이 스며 양말이 젖고 옷깃이 젖어들고 우산 아래 아무리 몸을 줄여도 머리가 눅눅해지는 오후.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이 세상 어떻게 건널까. *시집, 검은 밥에 관한 고백, 고두미 폭주족 - 류정환 누군가, 또 한 사람 이 세상을 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골목을 헤매고 있는지 좀처럼 귀가하지 않는 잠을 기다리는 여름밤, 비 쏟아져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상(地上)은 젖어 있었던 게 틀림없어. 우산이 없이는 외출할 수 없는 이곳은, 그러니까, 잠시 스..

한줄 詩 2019.06.18

불면의 습관 - 김석일

불면의 습관 - 김석일 머릿속을 휘젓는 하얀 밤을 만나면 아주 작아진 새가슴으로, 습관처럼 흑백 사진으로 저장된 옛날을 떠올립니다 거친 바람을 향해 앙칼지게 짖어대는 낡은 전깃줄의 갈라진 쉰 목소리에 너무 아팠던 젊은 날의 분노를 되씹고 창을 때리며 지나가는 억센 빗소리엔 번개 치던 골목으로 울먹울먹 돌아서던 수수깡 같던 친구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사락사락 분주하게 눈꽃 피는 겨울밤엔 길쭉한 미루나무 몇 그루 떨며 서 있던 가난한 고향의 눈 덮인 들녘을 헤매입니다 그리곤, 다시 뻑뻑한 눈 부릅뜨고 길을 나섭니다 하얀 밤이 가고 까만 일상이 열리는 익숙하고도 낯선 나만의 세상으로 *시집, 연화장 손님들, 북인 밤의 정의 - 김석일 해가 또 지고 어둠이 찾아온 후 내가 잠든 동안을 밤이라 말한다면 나의 밤은 ..

한줄 詩 2019.06.16

나팔꽃 담장 - 박형권

나팔꽃 담장 - 박형권 외치기 위해서 속을 보여야 하는 꽃 있다 담장 높고 창살 꽂고 철망 친 그 집에 고요한 외침 있다 대문이 닫힌 빨간 벽돌집에는 근처에만 가도 컹컹 개 짖는 소리가 귀청을 물어뜯는다 삐익삐익 방범 벨도 짖는다 저러고도 편안한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하는 그 집에 나팔꽃 나팔꽃 산사태처럼 피었다 머뭇머뭇 터질 듯 피었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나팔꽃 뇌관처럼 아찔하다 나팔꽃 보면 저 집 초인종 누르고 싶지만 날카로운 말에 찔릴지도 몰라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 길고양이도 피해갔다 여름 한철 다 지나도록 빨간 벽돌집은 굳건히 닫혀 있다 나팔꽃 저렇게 피워올릴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 시선이 찔려 눈 아린 걸 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은 있어 나팔꽃 철망 위로 선뜻 올려 놓았다..

한줄 詩 201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