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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젖은 장작 냄새가 난다 그가 오고 있나 보다 포실 포실한 흙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아궁이에선 벌써 불 냄새가 한창이다 그는 불을 품고 있다고 했다 강원도 산골에 산다는 그는 한여름에도 불이 좋다고 했다 그는 계영배를 구울 때처럼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만든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막걸리 사발 하나를 구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지 취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화전민의 유전자 때문이라고 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발가벗고 산으로 들어가 온 산을 불 지르고 그 불 맛을 실컷 퍼먹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고 했다 그는 봄마다 진달래와 얼레지로 정액을 만들고 산을 내려온다 바람 속에서 도끼를 입에 문 장작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드디어 옷을 벗고 그를 맞이해야..

한줄 詩 2020.03.03

요양꽃 - 이주언

요양꽃 - 이주언 나도 복사꽃 같은 풍경인 적 있었네 침 흘리는 내 입술도 한때 사내의 귓불 뜨겁게 했었지 봉긋한 가슴 열어 어린 것의 입에 물리고, 기저귀에 퍼질러진 냄새가 아닌 꽃향기 흘리며 사내의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었지 내 속으로 숱한 바람 불어와 닫힌 물관부 건조와 뒤틀림으로 훼손된 몸의 장치들 사이에서 기억이 헛돌고 밤낮이 바뀌고 혼자 닦지 못하는 배설에도 식욕은 떠나지 않아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통로 쪽으로 발을 뻗어 이어가는 목숨들 요양 꽃병 속에서 끝물의 목숨 게워내는 일은 참혹에 가까워 내 안의 물 바닥이 뿌옇게 드러나는 시간 보호사의 손길 아래 말라가는 살가죽 아직 게워내야 할 무엇이 더 남은 것인지 생이 바닥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네 소지를 태운 재처럼 나의 생, 가볍게 날..

한줄 詩 2020.03.03

사양 꿀 - 성봉수

사양 꿀 - 성봉수 낡은 도꼬리를 걸치고 길을 나선다 늘어진 주머니 안에서 나를 꼼지락거려도 네게 내줄 것이 없다 고래 그물이 되어 버린 가난의 주머니 오늘로 돌아와 도꼬리를 벗는데 절망과 포기의 그물 칸칸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과 코와 입술과 잔잔한 웃음 바랄 것 없이 내게 채워 살아, 봄 햇살 아래 서게 했던 그해 내 검은 겨울 안의 너 *시집, 바람 그리기, 책과나무 침을 발라라 - 성봉수 고갈된 난자 맘이 더 이상 고이지 않는 가랑이를 벌려 다가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네 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침이라도 발라야 했다 그리움의 독을 박박 긁어 여름 한낮 운동장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목이 타도록 침을 발랐다 달거리를 잃은 여인네는 전설 같은 오르가슴의 기억을 잡고 밤새 허리를 꼬며 안달하였으..

한줄 詩 2020.03.02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햇볕들이 지구별에 왕림을 하는가 양지공판장 앞 옹기종기 모여앉은 할머니들 무릎 위에 달랑 얼굴 하나씩 올려놓고 공손히 햇볕을 맞이하고 있다 영정에나 어울릴 법한 흑백사진들이 웃는다 잘 여문 호두알 같고 이리저리 엮어놓은 실타래 같다 입가에 새겨진 주름을 잡아당기면 곡진한 생애가 한 말쯤 술술 풀려나오겠다 한평생으로 풀지 못한 고통의 매듭들을 햇볕에라도 녹여 달래려는 심산인가 그림자에 물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땅이 꺼지는 줄도 모르고 햇볕을 영접하고 있다 빈 몸뚱어리 가득 노을을 쟁여넣고 있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배영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

한줄 詩 2020.03.02

배를 돌려라 - 하승수

요즘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능하면 밖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집에 일찍 들어온다. 덕분에 책 읽을 시간이 많아졌다. 서점에 가서 그동안 목록에 올려 놨던 책들을 꼼꼼히 살핀 끝에 고른 명 권의 책 중에 이 책이 포함된다. 이 책을 만든 출판사 는 대구에 있는 출판사로 좋은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괜찮은 출판사다. 책 만드는 사람들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살 텐데 이곳은 유행 타는 책을 잘 만들지 않는다. 얍삽하고 그럴 듯한 제목을 붙인 부동산 재테크나 자기개발서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또 무슨 출판사가 그리도 많은지 종이책이 안 팔리는 출판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게다가 저자의 정체성이 의심스럽고 수준 미달의 문장으로 가득한 책도 부지기수다. 시쳇말로 개나 소나 책 만드는 세상이다. 아마 ..

네줄 冊 2020.03.01

지른다는 것 - 이무열

지른다는 것 - 이무열 이십 년 넘게 꾸려온 '박가분朴家粉' 문 열자 마자 오늘은 꾀죄죄한 입성에 예사롭잖은 표정의 할머니 한 분 들어선다 ​ -몸이나 방에도 뿌리는 향수 하나 보여 보소 내한테 몸 냄새 쿰쿰하다는 그 짠한 말 차마 우짜겠노 지나 내나 영세 아파트 달셋방 주제에 다닥다닥 붙어 천날만날 싸울 수도 없고 -불가리나 버버리나 랑방 같은 향수가 좋긴 한데, 이런 건 보통 사오만 원씩 하는 겁니다 -그기 뭐꼬? 이름을 잘 모리겠는데 쫌 더 헐코 좋은 건 없으까 장개도 못들고 나이든 아들헌테 백인 냄새야 삭일 수 없다 치고, 이래봬도 젊은 날 혼잣몸 되어 칠십 평생 깨끗코 정하다는 말 들어 왔구마 -할인을 많이 해서 싼 건데 처음 보신 이것도 좋은 겁니다 -그라마 사장님이 좋다 카는 거 함 지를 텡..

한줄 詩 2020.02.29

허니랜드 - 타마라 코테프스카, 류보미르 스테파노프

마케도니아 공화국 영화다. 아니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 해야 맞다. 작년에 정식으로 한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유엔 가입국 중에 쿠바, 시리아와 함께 한국이 수교하지 못한 3개국 중 하나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리스와의 국가 이름 분쟁이 오랜 기간 계속되다 작년에서야 두 나라 정상의 협정으로 국가명에 합의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일본, 북한과 그렇듯 어느 나라든 가까이 있는 국가끼리 분쟁과 갈등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는 듯하다. 친구와 마누라는 바꿀 수 있어도 이웃 나라는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유럽의 작은 나라 북마케도니아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한국과 북마케도니아는 서로에게 생소하다. 봉준호 감독이 그랬다. 영화는 세계 공통의 언어라고,, 1인치 자막만 넘으면 세계 어떤 영화..

세줄 映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