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의 장난 - 손음

마루안 2021. 4. 11. 21:41

 

 

꽃의 장난 - 손음

 

 

꽃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들간들 논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간들간들 논다

바람과 햇볕이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격렬하게 꽃과 놀다 헤어지는 일

꽃은 사내처럼 가는 것이고 사내처럼 오는 것이다

나는 여배우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흥청망청 꽃을 운다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가는 세월을 구경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해졌다

이별은 허술한 요리사가 만드는 싸구려 음식 같은 것

 

오늘은 봄이고 나는 꽃을 만나러 간다

꽃을 헤어지러 간다

울면서도 가고 자빠지면서도 간다

내가 어쩌다 걱정한 꽃이

우리가 어쩌다 미워한 꽃이 그곳에 산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구두를 벗기도 전에

내 발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꽃의 자살을 멀쩡히 구경한다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걷는사람

 

 

 

 

 

 

창밖 목련 - 손음


조그맣고 허술한 트럭을 따라 봄날이 떠나가고 있다
풀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것들의 꽁무니를
흩날리는 꽃잎과 구부러진 길들이 따라간다
봄날은 조금씩 태어나고 떠나고 사라지면서
자신의 몸을 땅속에다 잃어버린다
사각사락 봄밤을 파먹으며 늙어 가는 것들 젊어 가는 것들
봄에 목련 밭으로 소풍 가자던 그녀는
어쩌자고 목련나무 아래 자신을 심었나
목련의 일이란 잠시 꽃의 행세만 하고 떠나가는 일
짧은 시간 동안 통점만 앓고 가는
꽃의 생애를 누가 기록해 줄 것인가
나는 묵묵히 목련을 걷는다
서둘어 늙어 버린 까맣고 슬픈 목련 한 장
한 잎의 적막이 떨어져 내린다
오늘은 오늘이라서 괜찮고
내일은 내일이라서 괜찮겠지




# 손음 시인은 1964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월간 <현대시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칸나의 저녁>이 있다. 첫 시집은 본명인 손순미로 냈고 이번이 두 번째 시집이다. 제11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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