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마루안 2021. 4. 12. 19:21

 

 

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망가진다 단지 읽어낼 수 있는 건 문양뿐이다 삐걱거리는 순간 방의 조직이 괴사한다

열어둔 통조림에서 이국의 햇빛이 쏟아진다 알루미늄 뚜껑에 생이 베인다 달콤한 피가 고인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

환풍기로 잘리는 바람이 물컹하다 높아지는 천장에서 뭘 하면 좋을까 잘린 바람이 머릿속을 헤맨다 몇 구의 사체가 곁에 눕는다

단물을 뱉자 햇빛이 목에 걸린다 동굴은 퍼지는 것을 오래 잡아둔다 이국의 태양과 절름거리는 바람이 다음 세기까지 머무를 것이다

파인애플 진액이 팔꿈치로 흐른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나를 저미는 순간 태양이 몸을 푼다

밀고와 열고의 차이를 안다면 동굴을 빠져나오는 거야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무덤을 뒤집는다 쏟아진 문양을 삼킨다 부러진 수레국화와 흩어지는 아열대기후 그해 여름과 두 개의 초승달 노르트하우젠에서 멈춰버린 시계와 시간을 뭉치는 사람들

그들을 문지른다 바스러지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것들 손가락으로 누른 것이 당신이었는지 나였는지 알 필요가 없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연필 - 김희준


장면을 스케치한다는 건 문구점에서 연필을 슬쩍하는 것만큼 스릴 있다는 얘기지

가령 실직한 아빠를 공원에서 마주칠 때의 동공이라거나 내가 사실 세탁소 아저씨의 딸이라 말하는 엄마의 성대라거나 길에서 여자에게 뺨을 맞는 오빠를 본다거나 그 여자와 같은 산부인과를 공유하는 언니가 비밀이라며 나에게 5백 원을 쥐여주는 사실을 연필로 그리는 순간들 말이야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비어버린 가족과 허기진 소통을 나누어 먹지

그러면 나는 부러진 연필을 깎고 쓰다 만 일기에 동그라미를 그려넣었어 최대한 둥글게 색을 칠하고 완성된 일기를 북북 찢었지 기겁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우리는 콩가루야 삼류도 못 돼 바람 부는 날 콩처럼 굴러가버릴 거야 저 밑으로 더 밑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말 많다 하지 마 공부는 연필이 알아서 하거든 지금 내가 그린 우리 가족처럼 말이야

연필 밑으로 스케치된 풍경이 어그러지고 나는 연필을 깎고 닳은 연필을 보다가 문구점으로 향하지

오늘은 어떤 순간을 그려볼까 고민하며 연필을 슬쩍하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말인데 문구점에서 전화가 와도 그 아줌마를 믿지 않았으면 해

 

 

 

 

#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진공 청소기에 입술 빨려 들어가듯 눈과 입에 착 달라붙는 시다. 누가 이 시인에게 이런 재능을 주었을까. 바이러스에 빼앗긴 봄날, 꽃잎이 콩가루처럼 날아 갔다. 싯구에서 묻어난 우울함이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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