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마루안 2022. 8. 25. 21:39

 

 

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영락없이 일모도원(日暮途遠) 황망한 나그네의 몰골이다.

처서 지나 뭇풀들이

색을 바꾼 궂은 잎 몇몇 매달고

갓 난 몸 겨드랑이에다 손톱만 한 꽃을 감추거나

이삭들 목을 뽑아 올린다.

이 얼마나 앙증맞은 절망의 기색들인지. 아니다.

이 얼마나 번식욕이 마려운 진지한 얼굴들인지.

차마 저들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왼종일

터앝에 와서 귀청 해진 내 귓때기나 내려놓는다

가승(家乘)에 무후(無後)다란 기록 한 줄 지우고 뭉개기 위해

인간도 생명에 된힘에 된힘을 더하지 않는가.

목숨붙이들 누구나 뒷날 세대를 노둣돌 삼아

시간의 텅 빈 통로를 뚜벅뚜벅 걷거나 건너뛰어

영원에 당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무한 미래를 위해 영근 종자들 속 어딘가 오고 있는

풋내기 나그네들 발소리를

오늘은 이 터앝 고랑에 서서

듣는다.

미처 익지 못한 씨앗을 앞섶 깊이

쟁이고 있는 유별난 늦가을 풀들.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죄의 빛깔 - 홍신선


무릇 산다는 일은 뭇 목숨 노략질하는 노릇이니
이 죄는 하늘 어느 부분에도 빌 자리 영영 없는 극악이 아닐까.
그럼에도 예초기 짊어지고 나는 터앝 밭두둑 깎는데
강한 풀내음 속에는 시산혈해를 이룬
허벅지 잘린 방아깨비, 더듬이 뭉개진 사마귀,
또 무언가의 떨어진 귀때기들.

이 도륙의 죄는 무슨 빛깔일까.
아마도 빛깔로만 치면
날로 야위어 기어가는 도랑 속 물줄기의 등짝,
적막이 고혈처럼 깊게 우러난
그러고도 앙상하게 갈비뼈 드러난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기어가다 잦는
가을물 등허리의 휑한 싯푸른 빛깔은 아닐는지.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