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마루안 2022. 8. 27. 21:48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왕벚나무 잔가지 태우며

뭔가 태우기를 좋아하는 나는

전생에 숯쟁인지 도가의 화공인지 모른다

부서진 고가구 태우다 오늘도 이웃에게 핀잔을 듣는다

 

참나무 태워 숯을 만들듯

고승의 다비가 한 줌 사리를 만들듯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탄생을 의미할 수도 있어

밤하늘에 별이 긴 꼬리를 사선으로 남기며 사라져도

어딘가에선 또 다른 별이 탄생해 영롱하게 빛날지니

 

소멸은 아름다운 것

 

폐목이 노무의 언 손 녹이듯

누군가 의해 나 숯이 되리라

칠순 바라보는 나이에 마지막 불꽃 피워 훗날

누군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면 나

그것으로 족하리라

 

 

*시집/ 멍/ 한그루

 

 

 

 

 

 

빈손 - 부정일

 

 

전봇대보다 더 커버린 아름드리 야자나무가 있다

중장비 없이 옮길 수도 없는 

몇 해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우듬지에 있던 까치집은

태풍 차바가 쓸고 간 밤 마당으로 떨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까치는 간 곳 없고 야자나무만 우두커니 서 있는데

몇 년 지난 어느 날

떠났던 까치 부부인가 한참 둘러보다 집을 짓는다

상처가 치유되어 폭풍의 밤마저 잊었는지

까치 부부 들락날락 비지땀 흘리고 있다

분양 현수막은 무이자라고 거리마다 나부끼는데

철탑의 보금자리는 백주에 예고도 없이 철거되어

품었던 새끼마저 길고양이에게 빼앗기고

집 없는 노숙의 서러움만 알아

흔들리는 야자나무에 돌아올 수밖에

 

이제 조경업자가 사러 온다 해도 팔 수는 없다

어쩌다 부처의 연 같은 연으로

우리 집 야자나무에 빈손으로 와 이웃이 돼 버린

그 사정 유추되는데

먹빛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조용히 떨어진 삭정이 물고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미안한 마음 그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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