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사, 악양 - 박남준

마루안 2013. 8. 20. 07:22



이사, 악양 - 박남준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밥을 짓고 국 끓이며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밥상머리 맞은편
내 뼈를 발라 살점 얹어 줄 사람의
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아직도 낯선 아랫마을 밤 개가
컹컹거리며 그 부재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별들과 산마을의 불빛들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우주의 경계로 인해
밤마다 한 몸이 되고는 했다
부럽기도 했다 해가 바뀔수록
검던 머리 더욱 희끗거리고
희끗거리며 날리는 눈발을 봐도
점점 무심해졌다
겨울바람이 처마 끝을 풀썩 뒤흔들며 간다
아침이 드는 창을 비워 두는 것은 옛 버릇이나
무덤을 앞둔 여우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북쪽 그리운 창을 향해 머리를 눕히고
길고 먼 꿈길을 청한다



*박남준 시집, 적막, 창작과비평

 






정리된 사람 - 박남준



깁고 기워 해묵은 것 낡은 수첩을 바꾼다. 거기 이미 지워져 안부가 두절된 이름과 건너뛰어 다시 옮겨지지 않는 이름과 이제 세상의 사람이 아닌 이름들이 있다. 이 밤, 누군가의 기억에도 내 이름 지워지고 건너뛰고 붉은 줄 죽죽 그어질 것이다





# 나는 시인을 두번 찾아갔다. 미증유의 IMF 사태가 일어난 1990년대 말쯤이다. 그는 모악산 아래 오두막에 살았다. 마당에 들어선 첫 느낌은 시에서 감지되는 그대로 적막이 감도는 쓸쓸함이었다. 늦가을과 바람이 났는지 시인은 없었다. 모든 잎을 떨구고 빨간 홍시를 매단 감나무 근처에서 청설모들만 바빴다. 반 시간쯤 빈 집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늦가울의 오후가 지독히 외로웠다.


일년 후쯤인가 전주를 여행하다 시인의 집을 다시 찾았다. 그 때도 늦가을이었고 그가 있었다. 찻잔을 마주하고 그가 틀어준 첼로 연주를 들었다. 그의 인생이 나와 많이 닮았다고 느끼자 슬펐다. 묘하게 슬픈 동질감이 싫지는 않았다. 반 시간쯤 머물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생각했다. 시인의 내면에는 천년 묵은 고독이 들어있다고,,,,


언젠가 그가 지리산 아래로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 이 시집도 그가 이사를 한 후에 나왔다. 음지의 연한 고사리가 갑자기 햇볕을 받아 조금 억세진 느낌이다. 시인의 말에서도 오십을 눈앞에 두고 사십대를 마감하면서 내는 시집이라고 했다. 그가 산다는 동매리를 가보진 않았으나 방향과 상관없이 서 있는 자리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는데 그는 아직 나와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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