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 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맨드라미 정원 - 이승희
저녁이 오지 않는 날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 사이에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있습니다
허공도 바닥도 아닌 곳에서
머리를 부딪쳐 피 흘리는 날 있습니다
잠을 자도 되는지
이쯤이면 그만 죽어도 되는지
묻지 못하는 날 있습니다
날마다 자라나는 과거도 있습니다
내가 버려진 상자가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무도 날 데리러 오지 않아도
장례식은 어디서든 시작되고 끝날 것입니다
나의 삶이란 한 줄로도 충분해서
누구든 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맨드라미 정원에 살고 있습니다
# 이승희 시인은 1965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1997년 <시와사람>,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가 있다. 시에서 느껴지는 여린 감성과 달리 남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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