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매미 새집에 들다 - 이윤승

마루안 2022. 9. 15. 21:40

 

 

말매미 새집에 들다 - 이윤승

 

 

지친 노구를 끌고 와 꽃밭에서 생을 마감한

말매미 한 마리

풍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 들어 살던 감나무 집 아래

풀씨들 찾아와 흰 꽃으로 장식한 아담한 관 속

나무에 붙어 있는 자세로 엎드린 채 누워 있다

 

평생 걸쳤던 낡은 육신을 벗어던진 후

몇 번의 비가 더 내리고

햇살들 앞다투어 찾아들면

낡은 몸뚱이는 왔던 곳으로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생전에 얼마나 웃고 울었는지

지상에서 보낸 짧은 삶은 따뜻했는지

물끄러미 바스러진 날개를 내려다본다

 

위로를 전할 상주 없는 관을 내려다보며

짧고 뜨거웠던 노래를 떠올리며

등짝을 덮은, 한때 빛나고 환했을 날개를 생각하며

 

우주의 세입자가 떠난

감나무 빈방 창가를 한참 동안 바라다보았다

골목을 지나온 바람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문학의전당

 

 

 

 

 

 

안녕 분홍 - 이윤승

 

 

벚나무 가지에

분홍분홍 꽃 필 때

그것이 벚나무의 꿈인 줄 몰랐을 때

목련, 목화솜 이불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를 때

그것이 목련의 꿈인 줄 미처 잊고 있을 때

 

벚나무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왔으며

목련에선 또 얼마나 멀어진 것인가

 

목 늘어진 양말을 신고

헐거운 브래지어 훅을 채우고

이 빠진 머그잔 커피를 마시며

벚나무를 모르고

목련을 모르고

누추인 걸 모르고

 

표정 없는 벽처럼

화분 속 뿌리처럼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안녕 목련

우리 이제 얼굴을 터야 하지 않을까

나뭇잎 흔들리듯이

섬을 찾아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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