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끈질긴 일 - 이돈형

마루안 2020. 10. 5. 19:35

 

 

끈질긴 일 - 이돈형 


나는 불길함에 그을려 닦아내도 보이지 않는 

여전히 나의 천적은 나라서 우연한 저녁과 사투를 벌이다 천천히 그러나 오랫동안 어둠에 투항하고 있다 

불을 데려오지 못하면 어쩌나 

너는 견고한 책상에 앉아 미래는 꿈 깬 자의 것이라는 강변을 이면지에 깨알같이 쓰고 있겠지만 

나는 미신이 믿을 만했다 

흰여우처럼 출몰해 온통 흰에 흰빛으로 뒤덮인 이면보다는 

노동에 깔려 말해줄 수 있는 게 이 저녁이 악다구니 쓰는 문패 같다는 아비의 억양에 위로받다가 

한번 놀란 아비처럼 무서운 가방을 둘러메고 나오는 너에게 이리 온 이리 온 벌린 팔에서 지린내가 난다 

불을 데려가지 못면 어쩌나 

끈질긴 일이었지만 너는 상의도 없이 불길함에 타죽은 것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지나갔다 

나를 빼놓지 않고 지나가 어둠을 삼킬 수 있었다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걷는사람 

 

 

 

 


경청 - 이돈형


가을을 데려다 며칠 살고 싶다 

안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며칠 지내고 싶다 

가을을 데려가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지만 데려다 발톱도 깎아 주고 손때 묻은 얼굴도 씻기다 보면

말개져서 

들여다본 내가 얼른 가을이 될 것 같아서 

가벼움의 늙음에 대해 입 아프게 떠들다 가을을 더듬어보는 죄나 지어야겠다 

죄를 지었으니 성자와 성부의 이름을 빌어 회개하다 내게 남은 막간이 없음을 알았을 때 

가을 엉덩이 한 번 더 두드리고 땅의 기도 소리나 엿들어야겠다 

그 소리에 나는 부끄러워져 가을 머리카락을 따다 말고 꼭꼭 숨어 가을만 훔쳐보다가 

끝낸 기도처럼 누워 

내안의 분란은 불태우고 가을의 분란은 내가 거둬야겠다 

 

 


*시인의 말 

202001291505 
그 끝이 덤덤하게 걸어가고 있다 

있어서 없음이 있고 없어서 있음이 있으니 
있고 없음의 뒤에 숨어도 되겠다 

한 말과 할 말이 가벼워지게 나를 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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