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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 즈음 - 강시현 시집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시도 그렇다. 서 말 아니라 백 말이라도 읽어주는 독자가 없으면 그건 한갓 이불 속에 혼자 숨어서 하는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 열 권의 시집을 냈는데도 그 시인에게 아무 궁금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단 한 권의 시집에서 그 시인을 홀딱 벗겨 해부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강시현 시인이 그렇다. 시를 읽으면서 어떤 사람일지 정체성이 궁금해지는 경우다. 이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이다. 한 시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권은 읽은 후라고 보는데 세 번째까지 갈 것 없이 제대로 빨려들었다. 이 시인은 첫 번째 시집부터 다소 두껍다. 두 권 다 거의 100여 편의 시가 실렸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건너 뛰고 싶은 작품 하나 없이 지루하지가 않고 술술 읽힌다...

네줄 冊 2022.03.31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이쪽 바닷자락이 슬슬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수평선 너머 저쪽 자락을 어떤 거대한 손이 쓱 잡아당기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여섯 시간 후 이쪽 자락 도로 슬슬 밀려드는데, 거대한 손은커녕 바닷자락을 문 갈매기조차 안 보여 냉철하게 가설을 바꿨네. 수평선 근처 물밑에서 어떤 거대한 손이 거기 한가운데 자락을 엄지, 검지, 중지로 살짝 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위로 올렸다 하는 것이 틀림없어! 수평선 근처 바다는 늘 잔잔하여, 살짝 건드린 자리도 대번에 눈에 뛸 테니, 검증은 일도 아니리. 수평선 바로 위에서 저공비행으로 수평선을 넘나드는 사인곡선을 그리면서 거기 잔잔한 바다, 더없이 고요한 그 기하학적 평면을 샅샅이 살피자. 꼬집힌 자국이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잘 다린..

한줄 詩 2022.03.30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 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 일찍 난로를 꺼 버린 탓에 감기가 왔나 봐 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 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 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 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 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 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 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 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 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 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모로 눕다 - 강문숙 따스하게 ..

한줄 詩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