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 ​ 새순이 올라오기 전에 꽃부터 걱정하는 마음처럼 조바심은 나를 흔든다 ​ 언젠간 오겠지만, 마른 가지를 어루만지며 입김을 불어 넣은 지 세 해가 다 되어도 꽃소식은 없다 ​ 꼭 보겠노라 애를 졸이며 종일 골목길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그리움보다 더 큰 불안이 여기에 있다 ​ 지나가던 이웃이 '너무 정을 주어도 잔병치레가 많고 결과 보기가 어렵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 어린 목련 묘목을 심고 해마다 퇴비를 주고 또 하루에도 수십 번 눈길을 주었으니 사람 같으면 질려서 숨이 막히고 괴로웠을 것이다 ​ 내가 머문 이 자리에 게으름을 잔뜩 남기고 타인보다 뒤쳐진 한 계절을 누린다 ​ ​ *시집/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 ​ ​ 복사꽃 아래 서면 - 박노식 ​ ​ ..

한줄 詩 2022.09.07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 - 기혁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 - 기혁 ​ ​ 생활이 바뀌면 피부가 아프다 ​ 환절기처럼 얇고 긴 겉옷 속에서 타인의 손을 탄 한 시절이 부풀어 오른다 ​ 열이 난다는 건 어딘가 높낮이가 생겼다는 증거 이별은 서로 다른 기후대를 만들고 각자 살아갈 짐승을 불러모은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코를 킁킁거리며 ​ 한때는 인적이라 불리던 체온의 이동 경로를 상상하는 짐승 ​ 피부에도 마음이 있을까 무리에서 떨어진 마음은 어떤 야성을 키울까 ​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과 날씨가 먼저 살에 맺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 생활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던 울음도 소매를 걷고서 딴청을 피운다 ​ 핏줄과 인연의 가장자리에서 한평생 피부만 문지르던 생식의 지리 ​ 마음은 길을 잃은 적이 없다 ​ 마지막 순간까지 생애의 한 ..

한줄 詩 2022.09.06

갈대로 사는 법 - 박봉준

갈대로 사는 법 - 박봉준 호숫가의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갈대를 보면 안다 뒤돌아서서 바람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갈대는 고개만 끄덕일 뿐 결코 맞서지 않는다 약자의 생존 방식을 누가 함부로 말하는가 먼저 나서지 말거라 아버지는 나에게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백발이 빛나는 갈대를 보면 이십 리 장에 가셨다가 해거름에 오시는 아버지 같다 그렇게 사셔도 기껏 예순다섯 해밖에 못 사셨다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내 편 - 박봉준 ​ 식구끼리 편 가른다고 어릴 적 어머니한테 그렇게 혼나고도 지금도 그 버릇은 뼛속에 파편처럼 박혀서 기회만 되면 뽀족한 가시를 세웁니다 엎치락뒤치락 새벽에야 끝난 개표방송 우리 편이 졌다고 우울하다는 친구가 꽃은 이미 시들었으니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우리..

한줄 詩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