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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튀긴 물고기와 가느다란 사랑, 그리고 사랑 없는 관공서의 조용한 오후 나는 마침내 내 인생에서 서울을 발견한다, 삼만오천 평의 하늘 그 모퉁이에서 어린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밀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구름이 잔뜩 짜증난 왕처럼 관악산을 넘어온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골프공이 골프채에 얻어맞는 소리, 이것이 인생이다 꿈에 나는 일등석 기차를 탔다, 헛수고였다 알몸의 흑인 여자를 만졌다, 헛수고였다 소나무 냄새 나는 소년이 작은 명상 속에서 생겨났다 오솔길로 사라졌다, 헛수고였다 왕이 짜증을 내면 왕비는 불안하고 우울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이 세상의 법칙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텐가 빌려 입은 옷 같은 인생, 떼쓰는 어린애를 안고 정부 보..

한줄 詩 2022.09.02

화투의 방식 - 박은영

화투의 방식 - 박은영 한때, 꽃이었던 적이 있었다 승부욕이 투철해 모이면 패를 섞었다 숨소리를 죽인 채 기리를 떼고 호기롭게 퉁을 외쳤다 뻑, 하면 싸고 나가리가 되었지만 폭탄을 안고 살았다 못 먹어도 붉거나 푸른 띠를 두르고 눈먼 새 다섯 마리를 잡으러 날밤을 샜다 죽고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싹쓸이를 한 인간은 죽지도 않았다 패 한 장을 잃은 나는 광을 팔았다 나중엔 껍데기도 팔았다 막판을 웃으면서 끝낸 적이 있던가 우리는 판을 엎고 멱살잡이를 하며 막판까지 갔다 흩날리는 꽃잎들, 그땐 모두가 화를 잘 냈다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만 있었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만두 - 박은영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비칠까 봐 커튼을 치고 살아도 속내를 들켰다 틈은 많..

한줄 詩 2022.09.02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나는 지금 앵두나무 아래 서 있다 봄날처럼 앵두나무는 무성한데 앵두는 없고 글썽하게 앵두를 훑던 바람만 갈팡질팡이다 지금 앵두나무를 지탱하는 건 자기 뿌리를 향해 무너지는 앵두의 그림자들, 그림자들을 밟고 가는 맨발들, 맨발들 위로 다시 솟아난 종아리들, 끝이 뾰족한 풀잎들 누군가 밤새 파헤치다 만 앵두나무 뿌리를 들썩이며 나는 앵두를 물들이던 붉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대배우 마릴린 먼로 말고는 떠올릴 사람이 없다 오로지 붉은, 생각만으로도 출출하게 흘러내리는 봄날 더는 머물 수 없어 나는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처럼 앵두나무 그늘에 서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호젓한 구월 - 문신 석양의 호숫길을 걷는 동안 나는 무대에 오른 광대의 기분으로 웃었다 ..

한줄 詩 2022.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