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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평균 - 이정록

감정의 평균 - 이정록 ​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일찍 뜬 별 하나에 눈을 맞추고 은하수가 흘러간 쪽으로 고개 들고 걸어갈 것 먼저 이별을 준비할 것 땡감처럼 바닥을 치지 말고 상처 없이 감꽃처럼 내려앉을 것 감꽃 목걸이처럼 감정의 중심에 실을 꿸 것 시나브로 검게 잊혀질 것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구멍 - 이정록 이거 말이여. 물려줘. 파스에 구멍이 났더라고. 한장밖에 안 썼어. 얼른 뗐어. 근데, 왜 닷새나 있다가 오셨어요? 구멍 난 파스 ..

한줄 詩 2022.09.12

태양은 최악이다 - 류흔

태양은 최악이다 - 류흔 태양이 망할 태양이 부욱 내 머리카락에 성냥을 그어댈 때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공중에다 삿대질을 한다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는 처녀와 연애를 못 한다 옛날에는 여럿을 전전했었지 그 시절 참 좋았다 전성기였어 처녀들은 반드시 전전긍긍했을 거야 나는 그녀들의 태양 처녀의 머리카락에 불이 났겠고 그녀들은 빠짐없이 나에게 삿대질을 했지 망할 놈의 새끼!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면 과거의 나 작은 오해가 있었다면 이해 바랄게 용서를 구할게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심지어는 태양에게도 털썩 무릎 꿇을게 과감히 무릎 꿇은 내가 자랑스럽다 태양이, 누구에게나 비추는 태양이지만 지금 나를 비추고 있는 태양이 부욱 찢은 꽃의 배후를 내 머리 위로 던지기 전까지는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

한줄 詩 2022.09.08

이불 - 박상천

이불 - 박상천 ​ ​ 가을을 지나 겨울 그리고 그 겨울이 깊어졌지만 어느 날 문득, 덮고 있는 이불이 여름 거 그대로임을 알았다. ​ 간혹 바뀐 이불의 두께와 무게로, 혹은 달라진 이불의 냄새로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곤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 그러나 이젠 시퍼런 가을 하늘도,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의미없는 시간의 한 구석 어딘가에 나는 버려져 있을 뿐이다. ​ 의미 없는 시간의 찬바람이 초라한 이불 속을 파고드는 밤, 아, 이불장 속 압축팩엔 그녀가 넣어둔 지난 계절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압축팩 지퍼를 열면 그 계절의 따뜻한 냄새가 부풀어 오르며 되살아 날 수 있을까?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정리 - 박상천 어쩌면 삶을 정리할 시간이 없..

한줄 詩 2022.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