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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생 - 박용하

열등생 - 박용하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자신만 알고 있는 나무 곁에 서서 쫓겨난 집과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그 오랜 묵시의 동굴을 따라 지구 반대에서 태양을 건져 올린다 천천히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천천히 자신의 주소가 소나무 숲일 때까지 어떤 조롱이 그를 더 멀리까지 밤길을 굴리게 한다 어떤 질타가 그를 더 멀리까지 빗방울의 밤들을 꿈 밝히게 한다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새들도 깃들이지 않는 벌판의 헛간에서 죽음을 나열하는 뒤죽박죽의 나뭇잎들을 탓하지 않으며 기억의 먼지들을, 모멸을, 생의 푸른 상처들을 불타는 물로 자존의 복수를 방전한다 스스로 구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번개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비의 눈빛들을 저 하늘의 달과 별 속에 풀어놓..

한줄 詩 2022.05.07

편지 - 박지영

편지 - 박지영 딸아, 엄마가 보듬고 산 25년의 결혼 생활은 벼락 맞은 감태나무 같았다 초로의 노인만 보면 무심하게 타고 내리는 버스에서도 가던 노선을 잃고 따라내려 킁킁거리며 마냥 눈물이 났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림이가 어느덧 밑동이 되어 울고 있었다 하루 치의 노동이 새벽에 이르러 멈출 때, 근근이 이어지는 속울음이 어깨 깃을 흔들고 떠나간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의 행간을 더듬을 때 날짐승처럼 꺽꺽거리며 출렁이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아들아, 꿈처럼 산 오늘이 너희가 밑동이 될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남은 너희들이 살아갈 날에 지팡이가 될 것이니 남은 노동은 얼마나 지난한 것이냐 하루 치의 노동에 한 스푼의 감사함으로 구멍 난 오늘을 꿰매며 살아라 인생이 벼락처럼 때리더라도 연수목이 되어라 ..

한줄 詩 2022.05.06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장세(場稅)를 못 낼 형편이라 외곽 담벼락 아래, 여기는 햇살이 참 따끈해요 그냥 모여 질끈 징검다리 놓아요 종일 기다려 몇 단 판 봄나물 파장 무렵, 눈길 끄는 저 신발 기술력이 좀 떨어진다고 나쁜 신발은 아니라네요 식구들 거 다 챙겨요 서울 것들, 눈여겨보지도 않을 테지만 임대료 유통마진 브랜드파워 세금까지 후려치고도 거뜬하다네요 서민경제 기여한다고도 하고, 그래서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더라도 가야할 길, 조여매고 가고 싶어요 꼭 가요 이류(二流)라도 일류 흉내 내면서 결국엔 가장 하류가 되면 마음 편할 거라 생각해요 나는 가당찮은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 옆 난전에서 만 원 석 장 트렁크 팬티도 마저 사서 입고 거침없이 달려 볼까나.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묵호..

한줄 詩 2022.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