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시력(視力), 또는 바코드 - 강시현 새벽에 널 안아 주고 오길 잘했다 거친 열대의 밤이 흘러갔다는 것을 내 몸에 무수히 박힌 숨구멍의 눈들이 모두 목격했다 오후의 깃발을 구청 공무원이 거둬 갔는지 바코드의 바람은 물컹해졌다 최신 가요와 술병이 나사처럼 조여진 유흥가의 흥취는 밝아 왔고 무연분묘의 헝클어진 뗏장처럼 네온사인이 뒷골목에 투숙했다 꿈이 없어 음악이나 하고 싶다고 노래방 주인은 흥얼거리며 빈 맥주병 박스를 쌓는다 경계 밖에선 누구나 무모함의 주먹을 쥐고 흔들었으나, 간절함이 사라진 거리에 이내 세금이 매겨지고 감시 카메라의 눈알이 불거졌다 첨벙대던 약속들, 그 불발의 결과물이 모여서 바코드 숲이 바람에 나부꼈다 애초에 약속 같은 건 없었고, 때 묻은 절망이 희망을 곁눈질하는 사이 노래가 없었다..

한줄 詩 2022.05.22

불시착 - 최백규

불시착 - 최백규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백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 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한줄 詩 2022.05.22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야적장 철근을 옮긴다 이것도 한때는 흐르는 물이었을 거라 먼 시간 저도 모르게 흘러와 쌓이고 굳었지만 물결이었을 때를 기억하느라 휘청거린다 현장에선 고요한 명산은 필요 없다 쓰임새에 맞으면 죽어서도 살아 있다 산 자의 근육처럼 일렁이는 철근 그림자 장비에 얹히는 철근 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 굽히며 겸손해진다 탄력과 반동에 익숙해진 습성 마치 저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한없이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은 대체로 패배나 열등이다 자본주의 장점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나절 휘청거리는 철근 몇 다발 옮겼을 뿐인데 한생이 다 흐른 듯 마음이 헐거워진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한줄 詩 202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