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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북쪽 - 김용태

내 생의 북쪽 - 김용태 싸리꽃 피었다, 졌다 봄이 갔다는 거다, 불쑥 다녀간 것이 계절만은 아니어서 그 아래 한 마리 나비, 환한 주검 펼쳐져 검은 상복 갖춰 입은 개미 행렬에 장엄히 실려 가고 있다 한철도 못 되는 생이지만 죽음이라 하면 저쯤은 되어야지, 혈육도 아닌 것을 쪼그리고 앉아 내 생의 북쪽을 가만히 들여다본 그런 날이 있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주검을 들추다가 - 김용태 채 육탈(肉脫) 되지 않은 주검 들추자 보기 흉한 것들 밥알처럼 매달려 어둠속에서 곡진한 조문, 바라보는 가슴 아리다 슬픔도 넘치면 때로는 소리를 잃는 것인지 곡(哭) 없이 마른 울음 삼키는 저들과, 죽어 허망한 것은 살아 무슨 인연이었길래 마지막 육즙(肉汁)마저 알뜰히 젖을 물리고 종래 터럭 하..

한줄 詩 2022.05.21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 강회진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

한줄 詩 2022.05.19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운성으로 가는 서사 - 이영춘 저 푸른 가지 끝에 등불 하나 달려 있다 그 불빛 아래 서성이는 거인의 목같이 긴 기다림의 목덜미가 욕망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있다 운명은, 어느 날은 서쪽으로 목이 기울고 어느 날은 동쪽 가지 끝에 매달려 그 성문 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 나를 판화 한다 오늘 이 순간, 동쪽으로 가는 문 활짝 열어 줄 거인은 누구인가 수성 성씨를 가진 물줄기의 기운으로 둥근 해를 건져 올릴 귀인은 누구인가 동쪽에서 온다는 나의 운수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침판을 돌리고 있는가 갈 길을 잃고, 방향을 잃고 아득한 저 방파제 너머 그린 듯 앉아 있는 어부의 칼끝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는 흰 고래 한 마리, 울컥울컥 비린 부유물 쏟아내며 붉은 햇덩이 안고 돌아올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 안에..

한줄 詩 20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