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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한줄 詩 2022.07.02

손톱달 - 심재휘

손톱달 - 심재휘 저녁볕을 옆으로 조금 밀어두고 그늘에 앉으면 마루 위의 그늘은 편지지를 깐 듯해서 편지를 쓰는 척 손톱을 깎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그 달밤에도 빈방에서 손톱을 바싹 깎았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니 어느덧 보름이 지나고 나는 웃자란 손톱을 깎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질 무렵은 그믐달이 뜰 차례 바싹 깎은 손톱으로 한동안 살은 시리겠습니다 그믐달같이 드러난 붉은 살은 차차 자라는 손톱 밑 어둠 속으로 들겠습니다 그믐은 조금씩 밝음으로 가겠습니다 오늘도 볕까지 튀어가지 못한 손톱들이 그늘에 삐뚤삐뚤 뭔가를 적는 것도 같았는데 그 편지는 잘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찌하겠습니까 자라는 손톱을 깎을수록 나의 달은 차지 못하여 당신이 돌아오는 길은 어둠에 묻힙니다 *..

한줄 詩 2022.07.01

민들레의 이름으로 - 박은영

민들레의 이름으로 - 박은영 내 몸은 감옥이다 문밖을 나서는 일이 이리도 힘들다는 걸 봄이 되고 알았다 면회 오는 이가 없어, 나는 혼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종이학을 접으며 차디찬 바닥을 떠나리라 악착같이 살았다 내 몸엔 수많은 담장이 있다 절망이 있다 아비는 술을 마시고 어미는 새벽기도를 나가고 그대들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이 죄목이 되었다 종이는 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꿈을 접는 건 가석방 없는 날들을 버티게 해 주었다 민들레의 이름으로 지하 계단의 무수한 턱을 내려가 무인점포를 접고 생을 접고, 내 몸이 부서지는 날 나는 천 마리의 학처럼 날아오를 것이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큐리오시티* - 박은영 나는 무거운 자아를 가졌다 중력을 거스르는 새벽 무게를 버린다 한곳으로..

한줄 詩 2022.07.01